영화 · 2025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 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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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라고 만든 자리에서 다섯 번 웃지 못했다

고요한땀· 2026. 11. 03.· 2,537자

결론부터 쓴다. 이 영화에서 나는 다섯 번 웃지 못했다. 다섯 번 모두 영화가 웃으라고 만들어 둔 자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이 억지로 들린다는 것을 알지만, 끝까지 읽으면 억지가 조금 덜해질 것이다. 조금만.

사정은 이렇다. 브리짓은 남편 마크를 4년 전에 잃었다. 인권 변호사였던 남편은 인도주의 활동 중에 폭발로 죽었고, 브리짓은 아들 빌리와 딸 메이블을 혼자 키운다. 영화는 그 남편의 추모 모임에 나가는 밤에서 시작해서, 1년 뒤 새해 전야의 파티로 끝난다. 그 사이에 공원을 순찰하던 스물아홉 살 록스터와 아이들 학교의 과학 교사 월리커가 들어온다. 로맨틱 코미디의 재료가 다 있다. 그런데 이 재료로 만든 웃음 장면들이 이상하게 웃기지 않는다. 순서대로 적는다.

  1. 나무. 마크의 생일에 브리짓은 아이들과 공원에 가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한다. 그 꼴을 순찰 중이던 록스터와 지나가던 월리커가 본다. 괜찮다는 브리짓의 말에 월리커는 그냥 지나가고, 록스터는 내려오는 것을 돕는다. 쉰 넘은 여자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그림은 분명히 웃기라고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 나무가 죽은 남편의 생일에 간 공원의 나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매달린 사람이 왜 올라갔는지가 먼저 생각난다. 웃음보다 걱정이 반 박자 빠르다.
  2. 입술. 친구들이 권한 입술 부풀리는 세럼을 바르고 브리짓의 입이 알레르기로 부어오른다. 이 시리즈가 처음부터 써 온 몸개그의 공식이고, 공식대로라면 여기서 웃어야 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세럼을 산 사람의 사정을 생각했다. 스물아홉 살과 만나기로 한 쉰 몇 살이 얼굴에 무언가를 바른다는 것. 부은 입술은 웃기고, 바르기 전의 마음은 웃기지 않다. 영화는 부은 입술을 보여 주면서 바르기 전의 마음을 같이 보여 준다. 그래서 반만 웃긴다.
  3. 직장. 브리짓이 방송국에 복직하자 동료들이 어젯밤에 섹스했느냐고 묻는다. 반가움을 성생활 질문으로 표현하는 직장 농담이다. 보통의 로맨틱 코미디라면 이 질문은 주인공의 연애를 재촉하는 양념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출근한 사람에게 던져진 그 질문은, 그 사람이 집에서 보낸 시간을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생략처럼 들렸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 챕터 스틸컷
  1. 수영장. 록스터가 친구 탈리타의 개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고, 젖은 셔츠로 걸어 나온다. 아마 이 시리즈가 처음부터 빚지고 있는 영국식 로맨스의 오래된 장면 하나를 흉내 낸 것일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물에서 나오는 그림은 그 자체로 웃음을 노린 것이고, 이 시리즈의 옛 팬이라면 웃어야 하는 자리다. 나는 웃는 대신 그 그림이 누구를 흉내 내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흉내 내는 쪽은 살아 있고 흉내의 원본은 이 영화에서 죽었다. 그렇다. 그래서 이 장면은 웃기려고 만든 장면 중에 가장 슬픈 장면이 된다.
  2. 베이비시터. 다니엘 클리버가 아이들을 봐 준다. 옛날에 브리짓을 속인 남자가 그 여자의 아이들을 돌보는 그림은 웃기라고 만든 것이 분명하고, 1년 뒤 새해 파티에서 그가 아이들에게 칵테일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그 사이에 다니엘이 심장 때문에 병원에 눕는 장면이 있다. 그는 보호자로 브리짓의 이름을 적고, 십 년 넘게 못 본 아들 이야기를 한다. 아이 보는 바람둥이는 웃기고, 자기 아이를 못 보는 바람둥이는 웃기지 않다. 영화는 둘을 같은 사람에게 준다.

다섯 장면의 공통점은 한 가지다. 웃음을 만들려고 쌓은 상황 바로 밑에, 영화가 애도라는 바닥을 깔아 두었다. 나무 밑에는 생일이 있고, 입술 밑에는 나이가 있고, 농담 밑에는 집에서 보낸 4년이 있고, 젖은 셔츠 밑에는 죽은 사람이 있고, 칵테일 밑에는 못 본 아들이 있다. 바닥이 보이면 웃음은 반쯤 꺾인다. 이것은 이 영화의 결함인가. 나는 설계라고 본다. 영화가 자기가 만든 웃음이 반만 웃기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하나 있다. 월리커다.

월리커는 이 영화에서 웃음의 재료로 거의 쓰이지 않는 인물이다. 브리짓이 빌리의 반에 가서 자기 직업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는 곤충의 한살이에 관해 인터뷰를 당하다가 모든 생물에게 영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교실에서 던지기에는 분위기를 깨는 질문이고, 그래서 웃으라고 넣은 질문이다. 그런데 그 질문은 사실 죽은 남편에 관한 질문이다. 영화는 웃기려고 만든 질문의 받는 쪽에, 이 영화에서 가장 웃기지 않은 사람을 세워 두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과 브리짓을 맺어 준다. 이 영화가 자기 웃음의 바닥을 알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 챕터 포스터

물론 내가 웃음에 둔한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나는 결혼식에서 울고 장례식에서 웃음을 참는 쪽이라 신뢰할 만한 관객이 못 된다. 웃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아는 한 그것은 대체로 남의 일에서 나온다. 남의 일이 내 일처럼 보이기 시작하면 웃음은 멈춘다. 이 영화는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보이게 하는 데 두 시간을 쓰고, 그 결과로 자기가 만든 웃음을 자기 손으로 꺾는다. 손해 보는 장사인데, 나는 그 손해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다섯 번 웃지 못했고, 그래서 좋았다. 결론으로 시작했으니 결론으로 돌아간다. 억지가 조금 덜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조금만이라도 덜해졌다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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