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0
동쪽의 에덴 극장판 - 파라다이스 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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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지운 사람만 남는다
뉴욕의 회전목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거기 서 있고, 남자의 어머니가 남겨 둔 금반지가 그 자리에 있다. 남자는 여자를 모른다. 여자는 남자를 찾아 바다를 건너왔다. 이것은 이번 영화의 장면이 아니다. 석 달 남짓 앞서 나온 전작, 극장판 1편의 장면이다. 나는 이번 영화를 그 회전목마에서부터 다시 보기로 했다.
전작의 제작 정보를 먼저 적어 둔다. 「동쪽의 에덴 극장판 I - The King of Eden」은 2009년 11월 28일 일본에서 공개됐고, 이번 작품과 같은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같은 스튜디오가 만들었다. TV 시리즈가 끝나고 반년 뒤의 이야기다. 한국 극장에는 2010년 1월 말에 걸렸다. 이번 작품 「파라다이스 로스트」는 2010년 3월 13일 일본에서 공개됐고, 전작이 끝난 지 몇 시간 뒤에서 시작한다. 두 편은 사실상 한 영화의 앞뒤다. 여러 리뷰가 그렇게 말하고, 나도 그렇게 봤다.
전작에서 사키는 녹음된 메시지 하나를 받는다. 둘만의 특별한 장소에서 만나자는 말이고, 그 장소는 뉴욕이다. 짐에서는 넣은 적 없는 총이 나오고, 택시 기사에게서 타키자와의 전화기를 되찾고, 마침내 그를 만나는데 그는 사키를 알아보지 못한다. 기억을 지웠기 때문이다. 시리즈 마지막에 그는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자신을 일본의 왕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이스에게 주문했다. 그 뒤에 회전목마가 있고, 금반지가 있고, 전 총리 집안의 사람들과 영화감독이라는 자가 두 사람을 덮치고, 세레손 쿠로하가 자기 주이스가 실린 트레일러를 모노노베의 미사일에 내주면서 두 사람을 일본행 비행기에 태운다. 한 리뷰는 이 영화의 뉴욕이 톨게이트 단말기와 택시 로고까지 정확하다고 썼다. 다른 리뷰는 기억을 잃었다는데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TV 시리즈 때와 똑같이 굴어서 기억 상실이라는 장치가 무의미해 보인다고 썼다. 나는 두 번째 리뷰의 불만에서 출발하고 싶다. 기억을 지웠는데 왜 사람은 그대로인가. 전작은 이 질문을 던져 놓고 답하지 않았다.
이번 작품은 나리타 공항에서 시작한다. 타키자와는 공안에 쫓기고, 전 총리의 미망인은 그의 유전자를 모으게 한다. 그가 죽은 총리의 숨겨 둔 아들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사키와 오스기는 그의 어머니 아야를 찾아가는데, 그는 술집을 하고 있고 옛 인연은 인정하되 어머니라는 확인은 끝내 하지 않는다. 그 사이 모노노베는 주이스가 실린 트럭들을 미사일로 부수고, 타키자와는 자기 몫의 주이스가 실린 트럭을 몰고 달아난다. 히라사와는 죽은 줄 알았던 노인 아토 사이조를 찾아내는데, 그가 미스터 아웃사이드이자 서포터다. 그리고 타키자와는 책 한 권 위에 전화기를 올려놓고, 일본 사람 모두의 휴대폰에 연설을 보낸다. 자신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면서, 받는 사람마다 1엔씩 보내면서.
여기서 되풀이가 시작된다. 전작에서 미사일은 쿠로하의 트레일러를 때렸다. 이번에는 모노노베가 트럭들을 하나씩 때린다. 같은 무기, 같은 표적. 그러나 내가 정말 묻고 싶은 되풀이는 기억이다. 아웃사이드는 게임을 끝내면서 세레손 전원을 승자라고 선언하고, 그들의 기억을 전화기를 통해 지운다. 한 리뷰는 이 대목을 두고 승자가 뻔한데 무승부를 선언한다고 썼다. 그런데 타키자와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이미 두 번 지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질문에서 시작하겠다. 전작의 기억 지우기와 이번 작품의 기억 지우기는 같은 것인가. 전작에서 지운 쪽은 타키자와 자신이었다. 스스로 선택했고, 그 결과를 사키가 뉴욕까지 가서 확인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다른 사람이 지운다. 당사자들은 묻지도 않았고 동의하지도 않았다. 같은 장치인데 방향이 반대다. 전작이 「내가 나를 지운다」였다면 이번은 「당신이 나를 지운다」다. 그리고 영화는 두 번 지운 사람에게는 이 두 번째 지움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자기 손으로 두 번 비운 사람은 남이 비울 수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냥 주인공을 남겨 두려는 편의인가. 망설임은 망설임이라고 쓰겠다.
달라진 것은 카메라가 선 자리다. 전작의 카메라는 두 사람에게 붙어 있었다. 뉴욕의 거리, 택시 안, 회전목마. 화면의 대부분이 사키와 타키자와의 얼굴이었고, 사건은 그 얼굴 뒤에서 일어났다. 이번 작품은 두 사람을 떼어 놓는다. 한 리뷰는 두 주인공이 영화 내내 거의 붙어 있지 못해서 답답했다고 썼고, 그 답답함은 사실이다. 사키는 술집에 있고 타키자와는 트럭에 있다. 카메라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다가 마지막에는 아예 그들을 떠나 일본 전체로 간다. 연설이 전화기 하나하나로 들어가는 순간, 관객이 앉은 자리는 더 이상 두 사람 옆이 아니다. 전화기를 받은 수천만 명 가운데 한 명의 자리다. 나는 이 이동이 이번 작품이 전작과 가장 다른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작이 「그를 찾는 여자」의 영화였다면 이번은 「그가 남기고 가는 것」의 영화다.
남기고 가는 것. 유전자 검사는 전 총리와 관계없다고 나온다. 타키자와는 사키에게 입을 맞추고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뒤 떠난다. 사키의 목소리가 반년이 지났는데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막이 다 올라간 뒤, 타키자와가 아웃사이드를 찾아내 슬리퍼로 얼굴을 한 대 때리고 그의 택시에 올라타며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장면을 본 리뷰들은 갈린다. 떠난 뒤로 사키를 만나러 오지도 않는다고 화를 낸 글이 있고, 감독이 이 인물을 아직 놓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은 글이 있다.
그렇다면 두 영화는 같은 질문을 다시 묻고 있는가. 이번 작품은 열두 명에게 백억 엔씩 주면서 던진 그 질문, 이 나라를 좋게 만들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으로 문을 연다. 전작은 그 질문을 미뤄 두었다. 사키가 타키자와를 찾는 데 한 편을 다 썼고, 질문은 뒤로 밀렸다. 이번 작품은 그 질문에 답하는 척한다. 연설이 있고, 1엔이 있고, 무승부가 있다. 그러나 답이 나오는 순간 영화는 답을 지운다. 기억을 지우듯이. 여러 리뷰가 이 결말을 두고 김이 샜다거나 수습에 그쳤다고 썼고, 나는 그 불만을 이해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를 지지한다. 질문을 두 편에 걸쳐 끌고 와서 마지막에 그 질문을 다시 관객의 전화기로 돌려보내는 영화는 드물기 때문이다.
되풀이되는 것은 기억을 지우는 손이고, 달라진 것은 그 손의 주인이다. 전작에서는 자기 손이었고 이번에는 남의 손이다. 그리고 남의 손이 닿지 않는 한 사람이 택시에 탄다. 그 택시가 어디로 가는지 영화는 보여 주지 않는다. 회전목마에서 시작한 두 편이 택시에서 끝난다. 둘 다 빙빙 돌거나 어디론가 가는 탈것이고, 둘 다 사람을 내려 주지 않는다.
마지막 질문은 당신에게 넘긴다. 두 번 지운 사람의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지운 사람의 것인가, 아니면 그가 지운 것을 끝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반년째 기다리는 사키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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