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메리 베리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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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수순 여덟 개를 미리 적어 두고 본 결과
로맨틱 코미디를 보실 때 미리 수순을 적어 두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1화를 틀기 전에 메모장에 여덟 줄을 적었다. 몰락한 도시 남자의 시골행, 첫 만남은 오해, 비 오는 날의 비닐하우스, 억지 동거, 라이벌 등장, 마을 축제와 경연, 불꽃놀이 아래 첫 입맞춤, 여주인공의 숨은 병. 적고 나서 좀 민망했다. 한일 합작이고 일본 섬이 배경이라 뭔가 다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변명했다. 4화까지 나온 지금, 메모장과 실제를 대조해 드리겠다.
먼저 작품 소개를 공손히. 서울의 공간 기획자 이유빈 씨가 하룻밤에 모든 것을 잃고 일본의 작은 섬 차로섬으로 가서, 딸기 농부 시라하마 카린 씨를 만난다. 한국 제작사와 일본 방송사가 함께 만든 10부작이고, 10월 7일부터 매주 수요일 한 편씩 나온다. 연출 두 분, 각본 한 분. 여기까지가 내가 알 도리가 있는 전부고, 나머지는 보면서 알았다.
- 예상: 몰락한 도시 남자의 시골행. 실제: 그대로다. 1화는 유빈 씨가 빌딩 숲에서 조명을 받으며 발표하는 장면으로 열리고, 믿었던 동업자의 비리와 계약 파기로 위약금을 떠안고 한 회 안에 바닥까지 간다. 섬에 가는 명분은 아버지 명의로 남은 땅이다. 몰락은 빠르고 땅은 멀다. 장르가 요구하는 속도를 정확히 지켰다 하겠다.
- 예상: 첫 만남은 오해. 실제: 그대로인데 메뉴가 구수하다. 배가 고픈 유빈 씨가 남의 딸기 하우스에 들어가 딸기를 먹다가 카린 씨와 마주친다. 그래서 2화 내내 딸기 도둑이다. 경찰서행을 피하려고 무보수로 밭일을 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는데, 이 타협안이야말로 로맨틱 코미디가 백 년 동안 써 온 고용 계약서다. 다만 훔친 것이 보석도 지갑도 아니고 딸기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자기 제목에 성실하다.
- 예상: 비 오는 날의 비닐하우스. 실제: 2화 끄트머리에 소나기가 오고, 비닐하우스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 뺨에 묻은 흙을 닦아 주다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메모장을 덮었다. 예상이 맞아서가 아니라, 맞을 줄 알면서도 설레는 자신이 한심해서였다. 소나기는 언제나 하우스 안에 두 사람만 남을 때 온다. 기상청도 이 장르 앞에서는 손을 든다.
- 예상: 억지 동거. 실제: 3화에 한집살이가 시작된다. 그런데 3화 마지막에 유빈 씨가 카린 씨에게 「네가 쓰러지면 다 받아 주겠다, 믿어도 된다」고 말한다. 동거 시작과 동시에 보호 선언이 나온 셈인데, 보통 이 말은 7화쯤에 나온다. 수순은 지켰고 순서가 당겨졌다. 10화짜리의 중반 대사를 당겨 쓴 것이, 아껴 둔 반찬을 첫날 다 내놓은 것 같아 살짝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 예상: 라이벌 등장. 실제: 3화에 카린 씨의 대학 동기이자 오랜 라이벌인 레이지 씨가 화려한 부스를 끌고 나타나고,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이 돈다. 이 사람이 연애 쪽 라이벌인지 농사 쪽 라이벌인지 4화까지는 가려지지 않는데, 그 애매함이 오히려 장르 교과서에 충실하다. 다 차려진 밥상에서 반찬 하나를 바꾼 정도라 하겠다.
- 예상: 마을 축제와 경연. 실제: 「그린 노바 코퍼레이션 페스타」라는 긴 이름의 지역 농산물 경연이 3화에서 준비되고 4화에 열린다. 유빈 씨가 부스를 설계하고 마을 사람들이 응원하고, 두 사람은 우승한다. 몰락한 공간 기획자가 딸기 부스로 재기의 첫 삽을 뜨는 것까지 수순 그대로다. 이름이 길어서 나는 세 번 들어야 외웠다.
- 예상: 불꽃놀이 아래 첫 입맞춤. 실제: 4화. 우승 뒤 불꽃축제로 가서 카린 씨의 「좋아해」가 나오고, 불꽃 아래서 입을 맞춘다. 10부작의 4화다. 나는 메모장에 「8화」라고 적어 두었다. 수순은 맞고 시계가 틀렸다. 고백이 유빈 씨 쪽에서만 나올 줄 알았는데 카린 씨 입에서 저 말이 나온 것도 적어 두지 못했다. 두 가지 다 내 예상이 물린 자리다.
- 예상: 여주인공의 숨은 병. 실제: 있다. 카린 씨는 심박수가 오르면 쓰러지는 질환이 있어 사랑을 두려워한다. 여기서 나는 과연 소리를 냈다. 로맨틱 코미디의 연료는 두근거림인데, 이 작품은 두근거림 자체를 의학적 위험으로 설정했다. 설레면 쓰러지는 여주인공에게 설렘을 주는 것이 남주인공의 역할이라면, 이 남자는 구애하는 사람인 동시에 위험 요인이다. 3화의 「쓰러지면 다 받아 주겠다」가 이제야 다른 뜻으로 들린다. 뻔한 병 설정을 장르의 엔진에 직접 연결한 것인데, 이건 밥상을 물린 게 아니라 밥상 다리를 잘라 높이를 바꾼 격이다.
여덟 개 중 여덟 개가 나왔다. 그런데 메모장에 없던 아홉 번째가 4화 끝에 나왔다. 페스타 심사위원으로 나온 쿠로카와 마사토 씨가 유빈 씨를 보고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았군」이라고 한다. 아버지 명의의 땅, 아버지의 과거, 닮은 얼굴. 이 수순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주말 가족극의 것이다. 두 장르의 밥상이 한 상에 차려지려는 중이고, 나는 이게 반가운지 걱정되는지 아직 모르겠다.
곁가지도 적어 둔다. 워킹홀리데이로 왔다가 섬에 남은 박구남 씨와, 남의 연애는 봐 주지만 자기 연애는 점칠 수 없는 타로술사 미즈노 마리 씨. 이 두 분의 선은 예상 수순표에 넣지도 않았는데 가장 안심하고 보게 된다. 수순이 뻔할수록 안심이 되는 장르가 있고, 이 장르가 그렇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뻔한 수순을 하나도 빼지 않고, 순서만 앞으로 당기고, 병 하나를 장르의 심장에 꽂았다. 다 차려진 밥상이었고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들면서 좀 억울했다.
아무튼. 5화는 내일 나온다. 메모장에는 이제 「병의 정체」와 「아버지의 과거」 두 줄만 남았다. 둘 다 맞으면 다시 억울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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