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블랙 백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식탁 위에 올려 둔 권총에 관한 민원

예민한책장· 2026. 10. 25.· 2,722자

결론부터 말씀드리겠다.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도 민원을 넣는 까닭은, 재미있게 본 사람의 민원이야말로 성의 있는 민원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아래 다섯 건은 모두 정중한 마음으로 작성했으며, 처리 결과는 통보받지 않아도 된다.

사정은 이렇다. 영국 정보국의 요원 조지에게 상관 미첨이 일주일을 준다. 세베루스라는 기밀 프로그램이 밖으로 새어 나갔고, 용의자는 다섯. 그중 한 명이 아내 캐슬린이다. 영화는 이 소식을 받으러 가는 조지를 런던의 뒷골목과 지하 클럽을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끊지 않고 따라간다. 여기까지는 좋다. 첩보물을 좀 보신 분들이라면 이쯤에서 벌써 수순을 외우기 시작하실 텐데, 저도 외웠다. 집으로 부르는 저녁 식사, 수상한 종이쪽지, 아내의 해외 출장, 거짓말 탐지기, 윗분의 수상한 미소, 그리고 다시 저녁 식사. 과연 그 순서 그대로 왔다.

민원 1. 저녁 식사에 약을 타신 건에 대하여

조지는 용의자 넷을 집으로 부른다. 직접 요리를 하고, 한 접시에 말이 술술 나오게 하는 약을 섞는다. 그러고는 옆 사람을 위한 결심을 하나씩 말해 보라는 놀이를 시킨다. 결과는 훌륭했다. 서로의 바람이 식탁 위로 올라오고, 클라리사 씨는 스테이크 나이프로 애인 프레디 씨의 손등을 찍는다. 그런데 민원인이 여쭙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손님 전원이 정보국 요원이다. 그 요원들께서 동료 집 저녁상에 무엇이 들었는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설계 오류라 하겠다. 시정 요청: 적어도 한 분은 접시를 슬쩍 밀어내 주셨으면 했다.

민원 2. 휴지통의 영화표

조지는 집 휴지통에서 영화표 한 장을 찾는다. 부부가 같이 보지 않은 영화다. 캐슬린에게 물으니 그 영화는 보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민원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정보국의 간부가, 그것도 남편이 방첩 담당인 집에서, 자기 말과 맞지 않는 종이를 집 휴지통에 버리셨다. 이것은 보안 사고가 아니라 분리수거 사고다. 시정 요청: 표는 극장 휴지통에 버려 주시기 바란다. 아니면 적어도 잘게 찢어 주시기 바란다. 국가 기밀을 다루는 분의 휴지통은 국가의 휴지통이다.

블랙 백 스틸컷

민원 3. 윗분이 범인이신 건에 대하여

국장 스티글리츠 씨가 세베루스를 러시아 쪽에 흘렸고, 조지의 부하인 스토크스 대령이 손발이 되었다. 러시아의 원자로를 녹여 그 나라 정부를 흔들겠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장르를 조금만 보신 분들이라면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제일 점잖게 웃는 분이 제일 수상하다」는 공식을 알고 계실 텐데, 영화도 그 공식을 고스란히 따랐다. 다 차려진 밥상을 물릴 기회가 한 번 있었다. 조지가 두 개의 계획이 동시에 굴러가고 있었다고 설명할 때, 저는 잠깐 다른 결말을 기대했던 것이다. 시정 요청은 따로 없다. 다만 다음 편이 있다면 국장님은 그냥 국장님이셨으면 한다.

민원 4. 식탁 위의 권총

마지막 저녁. 여섯이 다시 그 식탁에 앉고, 식탁 위에 권총 한 자루가 올라온다. 조지가 묻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총을 맞는다는 규칙이다. 조지가 미얀마에서 찍힌 사진을 내밀자 스토크스 대령은 총을 집어 들고, 자백을 하고, 조지에게 두 발을 쏜다. 공포탄이다. 그러자 캐슬린이 가방에서 진짜 총을 꺼낸다. 민원인은 여기서 「범인이 총을 집고 자백한다」는 수순을 이 영화에서 세 번째로 확인했다. 범인께서 총을 집어 주셔야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 그리고 그 총이 반드시 공포탄이라는 점. 이것은 설계 오류라기보다 설계 관습이라 하겠다. 시정 요청: 한 번쯤은 범인이 총을 집지 않고 조용히 디저트를 드셨으면 한다. 그러면 영화가 안 끝나는 것은 알지만, 민원은 원래 그런 것이다.

민원 5. 드론으로 처리하신 건에 대하여

세베루스를 들고 달아난 러시아 쪽 사람들은 폴란드를 지나다 미국의 드론에 맞는다. 캐슬린이 미국 쪽에 위치를 흘린 덕이다. 영화 내내 식탁과 사무실에서 말로 싸우더니, 정작 수천 명의 목숨이 걸렸다던 물건은 조지도 저도 없는 폴란드 어느 길 위에서 처리되었다. 그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이 점에 대해 영화는 일언반구 해명이 없다. 시정 요청: 말로 시작한 일은 말로 끝내 주시거나, 적어도 그 길을 한 번은 보여 주시기 바란다.

블랙 백 포스터

그래도 구수한 것

거짓말 탐지기 장면이다. 조지가 용의자 넷을 차례로 기계 앞에 앉히는데, 영화는 네 사람의 검사를 잘게 썰어 번갈아 붙인다. 카메라 세 대가 숨지도 않고 얼굴을 겨눈다. 스토크스 대령은 「더 큰 선이 당장의 윤리나 법의 한계보다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거부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숨이 짧고 가장 말이 빠른 대목이고, 제가 소리 내어 웃은 유일한 곳이다. 그리고 조지의 그 두꺼운 안경. 안경 하나로 저 사람은 거짓말을 안 할 것 같다고 믿게 만드는 재주는 구수하다 못해 부러웠다.

답변서

귀하의 민원 잘 받았다. 본 영화는 상영시간 94분으로, 첩보물의 수순을 새로 짤 시간이 없었음을 양해 바란다. 대신 그 수순을 결혼 이야기의 틀로 썼다. 「블랙 백」이란 국가 기밀이라 말할 수 없을 때 부부가 서로에게 던지는 한마디로, 묻지 않는 것이 곧 믿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약을 탄 저녁과 공포탄은 그 믿음을 시험하는 장치였으며, 윗분이 범인인 것은 장르의 관습이 아니라 조직의 관습임을 밝혀 둔다. 영화표 건은 할 말이 없다. 아무튼.

추신. 캐슬린이 마지막에 묻는다. 취리히 계좌의 700만 파운드는 어떻게 됐느냐고. 조지는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고 답한다. 이 민원은 두 분이 그 돈으로 무엇을 하실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한다. 그건 블랙 백이라 하겠다.

댓글

0 / 1,00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블랙 백의 다른 리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