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눈동자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눈을 감아도 안 끝나는 영화

방랑객· 2026. 11. 01.· 1,819자

장면 하나로 시작한다. 붉은 불빛. 벽을 가득 채운 눈동자 사진들. 제목이 「눈동자」인데 첫 장면부터 눈이 수십 개다. 보는 쪽은 사진이고 보이는 쪽은 나다. 거꾸로 시작하는 영화다. 그리고 끝까지 거꾸로 간다. 보는 사람이 못 보게 되고, 돕는 사람이 해치는 사람이 된다.

염지호 감독, 2026년 6월 개봉, 105분. 스페인 영화 「줄리아의 눈」이 원작이다. 원작은 동생이 언니의 죽음을 쫓고, 이 영화는 언니가 동생의 죽음을 쫓는다. 사진작가 서진과 쌍둥이 동생 서인을 한 배우가 맡는다. 기억에 남은 순간 열 개를 적는다. 범인과 결말을 쓴다. 순서는 내 마음대로다.

1. 전자발찌를 끊었다는 소식. 자기 모델이었던 남자가 발찌를 끊었다. 서진은 서울을 떠나 동생 집으로 간다. 도망친 곳이 더 무서운 곳이라는 건 스릴러의 오래된 규칙이다. 이 영화는 그 규칙을 처음부터 지킨다.

눈동자 스틸컷

2. 지하에서 동생을 찾는 장면. 경찰은 스스로 떠난 거라고 한다. 서진만 아니라고 한다. 관 속에 누운 얼굴이 자기 얼굴이다. 쌍둥이라서 가능한 장면이고, 쌍둥이라서 잔인한 장면이다. 자기 장례를 미리 보는 사람을 나는 처음 봤다.

3. 동생이 숨긴 것들. 서인은 수술을 받았고, 호텔에 다녀갔다. 언니는 둘 다 몰랐다. 같은 얼굴로 태어나도 모르는 게 이렇게 많다. 쌍둥이는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이 영화는 믿지 않는다. 나도 안 믿기로 했다.

4. 스튜디오의 남자. 모델 현민. 눈빛이 처음부터 끝까지 과하다. 너무 대놓고 수상한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는 것도 스릴러의 규칙이다. 영화도 그걸 안다. 알면서 그를 오래 세워 둔다. 관객이 그를 보는 동안 다른 사람이 서진 옆에 앉는다.

5. 화면이 흐려진다. 서진의 눈이 흐려질 때마다 화면도 흐려진다. 대신 소리가 커진다. 발소리, 문소리, 숨소리. 눈을 감아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는 데 오 분쯤 걸렸다. 눈을 감으면 이 영화는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무서워진다.

눈동자 스틸컷

6. 동생의 작업실. 서인은 먼저 눈을 잃고도 흙을 만졌다. 작업실에 작품들이 남아 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손으로 남긴 것과 보는 사람이 빛으로 남긴 것이 한 집에 있다. 이건 내 풀이다.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7. 의사의 말. 수술 뒤 붕대를 감는다. 한 달 안에 풀면 다시는 못 본다는 말을 듣는다. 한 달의 어둠과 영원한 어둠 사이에 서진이 서 있다. 후반부는 전부 이 한 달 안에서 벌어진다. 시계가 안 보이는 시한폭탄이다.

8. 맨발로 빗길을 달리는 장면. 붕대를 감은 채다. 신발을 신을 시간도 없었다는 뜻이다. 어디로 가는지 본인도 모른다. 그런데 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몸으로 오는 장면이다. 공포는 머리로 오는 게 아니라 발바닥으로 온다는 걸 배웠다.

눈동자 포스터

9. 어둠 속의 싸움. 범인은 끝까지 서진 곁에 있던 사람이다. 형사 도혁. 돕는 얼굴로 왔다. 한 줄만 적는다. 불 꺼진 집에서 서진은 소리와 손끝으로 싸운다. 경찰이 들어온다. 서진은 산다. 범인은 스스로 끝낸다. 긴 장면인데 기억나는 건 숨소리뿐이다.

10. 크레딧. 쿠키 영상이 없다. 글자가 올라가고, 끝난다. 아무것도 없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안심되는 순간이다.

삼행시 하나. 눈, 눈을 감아도. 동, 동생은 돌아오지 않고. 자, 자꾸 소리만 커진다.

좋은 영화다. 다만 범인을 영화보다 먼저 알아챘다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랬는지는 적지 않겠다. 적으면 멋있어 보이니까. 대신 이건 적는다. 범인을 알고 봐도 무서운 건 범인이 아니라 서진이 못 보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알고 봐도 줄지 않는다.

벽의 눈동자 사진들로 돌아간다. 그 눈들은 서진을 보고 있었던 게 아니다. 서진 옆에 누가 앉는지 보고 있었다. 나만 몰랐다.

댓글

0 / 1,00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눈동자의 다른 리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