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3

파벨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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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하나를 바꾸고 얻은 것, 잃은 것

막판뒤집기· 2026. 10. 30.· 2,980자

파벨만이라는 성은 세상에 없다. 각본가가 '우화'라는 뜻의 독일어에 감독의 성을 포개어 만든 말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이것은 내 집 이야기지만, 우화로 들어 달라고.

그래서 나는 보는 내내 비율을 재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있었던 일이고 어디부터가 지어 넣은 것인가. 물론 내가 그 집 거실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감독이 직접 한 말, 전기 작가의 글, 몇 편의 기사를 읽고 대강 센 것이니 틀린 자리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세어 보니 재미있는 구석이 꽤 있었다.

먼저 바탕. 감독은 이 영화를 부모에게 바쳤다. 어머니는 2017년에, 아버지는 2020년에 세상을 떠났고, 두 사람 다 생전에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라고 아들을 졸랐다고 한다. 각본은 두 달 만에 끝났고, 감독은 초고를 누이들에게 보내 기억을 맞췄다. 즉 이 우화는 당사자들이 읽고 고친 우화다. 그 점을 기억해 두고 아래 목록을 보면 좋겠다.

파벨만스 스틸컷

실제 / 이 작품

  • 이름. 실제 — 어머니는 피아노를 치던 리아, 아버지는 컴퓨터 기술자 아놀드,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같은 분야 기술자였던 버니. / 이 작품 — 밋지, 버트, 베니. 성은 파벨만.
  • 발견. 실제 — 아들은 열여섯 살에 자기가 찍은 필름에서 어머니와 그 친구가 가까워진 것을 알았다. 아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몰랐다고 한다. / 이 작품 — 캠핑에서 찍은 필름을 편집하다 알게 되고, 혼자 벽장에서 본다. 거의 그대로다.
  • 책임. 실제 —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이혼이 자기 뜻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를 지키려고 그랬다고 뒤에 밝혔다. 아들은 그 뒤 열다섯 해 가까이 아버지와 멀어졌다. / 이 작품 — 아버지가 짐을 대신 지는 장면이 그대로 있다. 다만 전기 작가는 그 무렵 실제 소년이 영화가 보여 주는 것보다 어머니 쪽을 더 원망했다고 적는다.
  • 연도. 실제 — 고등학교 졸업은 1965년. / 이 작품 — 1964년. 전기 작가는 감독이 늘 날짜에 약하다고 썼다.
  • 학교의 그 아이. 실제 — 영화를 본 아이는 사람이 달라진 듯 다가와 영화가 웃겼다고 말했다. / 이 작품 — 로건은 울면서 자기의 약한 속을 고백한다.
  • 아버지의 몫. 실제 — 아버지는 아들의 초기 영화, 특히 십 대에 만든 장편 습작을 많이 도왔다. / 이 작품 — 그 몫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버트는 편집기를 사 주고 뒤로 물러난다.
  • 집. 실제 — 캘리포니아에서는 셋집과 임시 거처를 옮겨 다녔다. / 이 작품 — 로스가토스의 집 한 채는 지어낸 것이다. 거꾸로 피닉스의 집은 감독이 기억으로 그린 평면도와 가족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 원숭이. 실제 — 어머니가 가게에서 원숭이를 데려왔다. 감독은 그것이 우울하던 어머니에게 치료 친구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 이 작품 — 그대로 있다.
  • 지평선. 실제 — 감독은 젊을 때 텔레비전 제작자의 소개로 노감독을 만났고, 지평선이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으면 재미있고 가운데 있으면 지루하다는 말을 들었다. 한 자료는 그때 열다섯 살이었다고 적는다. / 이 작품 — 고등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와 살던 때다.
  • 그다음. 실제 — 어머니는 그 친구와 1967년에 결혼했고, 아들은 오랜 뒤 아버지와 화해했다. / 이 작품 —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지평선에서 끝난다.
파벨만스 스틸컷

바뀐 세 곳

열 줄 가운데 거의 그대로인 것이 여섯, 손을 댄 것이 넷쯤이다. 어림잡아 사실 여섯에 우화 넷. 그중 세 곳이 눈에 밟혔다.

첫째, 아버지의 몫을 덜어 낸 것. 왜 그랬을까. 아마 발견을 아들 혼자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필름이 진실을 먼저 말하고, 소년이 그것을 믿는 이야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기 눈이 말하는 진실은 믿지 않았고 필름이 말하는 것만 믿었다고 했다. 그 문장을 영화로 만들려면 아버지가 옆에서 같이 필름을 자르고 있으면 안 된다. 얻은 것은 그 벽장의 고독이고, 잃은 것은 실제보다 조금 더 멀리 서 있는 아버지다. 추측이다.

둘째, 로건의 눈물. 실제의 결말은 싱겁다. 아이가 와서 웃겼다고 했다. 영화는 그 자리에 긴 대화를 넣고, 카메라가 사람을 실제보다 멋지게 만들어 버렸을 때 당사자가 겪는 혼란을 보여 준다. 이 바꿈은 주제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필름은 진실을 찍기도 하고, 거짓을 만들기도 한다. 캠핑에서는 앞엣것을, 해변에서는 뒤엣것을 한 소년이 다 겪어야 지평선 이야기가 성립한다. 얻은 것은 주제의 대칭이고, 잃은 것은 싱거운 실제가 가진 사실감이다.

셋째, 원망의 방향. 영화는 아버지가 짐을 지는 장면을 넣으면서도 아들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자리에 놓인다. 감독은 이 영화에 악당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실제 삶에서는 원망이 이쪽저쪽으로 오래 흘렀을 것이다. 열다섯 해의 거리는 원망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 영화는 그 세월을 통째로 들어냈다. 얻은 것은 평형이고, 잃은 것은 시간이다.

파벨만스 스틸컷

이쯤에서 나는 사실과 우화의 비율을 따지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 되물었다. 우주에는 애초에 '정확한 가족사'라는 것이 없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대로 지나가 버렸고, 남은 것은 서로 다른 몇 사람의 기억뿐이다. 감독이 누이들에게 원고를 보내 맞춘 것도 기억과 기억을 맞춘 것이지 사실과 맞춘 것이 아니다. 우리도 똑같이 한다. 동창회에서 옛날 이야기를 할 때, 아이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 줄 때, 십 년 전 일기를 다시 읽을 때. 셋 다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셋 다 우화다.

그래도 사람은 비율을 잰다. 나도 쟀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영화가 아니라,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이야기를 꼭 만들라고 아들을 졸랐다는 두 사람이다. 자기들의 가장 아픈 자리가 우화로 바뀌어 세상에 나가는 것을 그들은 원했다. 그 마음의 비율은 내가 잴 수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은 노감독의 말대로 카메라를 조금 기울여 지평선을 가운데에서 비켜 놓는다. 사실과 우화도 그런 것 같다. 반반으로 가운데 놓으면 지루하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여야 보인다. 이 영화는 우화 쪽으로 기울였고, 그래서 사실이 보였다. 나는 거기서 비율 재기를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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