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0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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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분짜리 열 토막은 영화가 되는가

조용한근육맨· 2026. 10. 26.· 3,548자

질문은 이것이다. 다섯 분 안팎의 토막 열 개를 이어 붙인 것을 영화라고 불러도 되는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2010년 5월 24일부터 매주 월요일 아침 인터넷에 한 편씩 무료로 올라온 인디 시트콤이다. 제작비는 1,500만 원 안팎으로 보도되었다. 그해 가을 부산의 영화제에서 한 편으로 묶여 상영되었고, 12월 1일에 78분짜리로 극장에 걸렸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그 극장판이다. 배우 매니저 재민이 주인공이고, 이혼한 전처 하라를 잊지 못하며, 그가 맡은 배우 혁권은 중요한 자리마다 괜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누나 재주와 목사인 매형 한철, 결혼을 생각하는 여동생 재은, 단골 카페 가화의 알바 희본과 모미가 그 주변에 있다.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먼저 이 작품을 싫어할 사람의 자리에 앉아 보려 한다. 그 논리를 약하게 적어 놓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반론

첫 번째 반론.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묶음이다. 어느 관객은 시트콤은 짧게 치고 빠져야 하는데 영화 형태로 이어 보니 재미가 반감된다고 적었다. 에피소드마다 완성도의 편차가 있다는 평도 있다. 세 번째 토막을 보자. 오디션을 마치고 나온 재민이 전처의 전화를 받는 동안, 카페 가화에서는 알바 희본에게 홍어 택배가 배달되고 붙박이로 앉아 있던 손님이 그 냄새를 맡는다. 두 줄기는 같은 토막 안에 놓여 있을 뿐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다. 다섯 분 안에서는 그것이 재치였을지 몰라도, 78분 안에서는 그냥 느슨함으로 보일 수 있다.

두 번째 반론. 사건이 없다. 흰소리가 전부다. 여섯 번째 토막에서 동남아를 여행 중인 부모는 전화를 걸어 지난 정권에 관한 수다를 삼남매에게 한참 쏟아 놓는다. 여덟 번째 토막에서 누나 부부는 아침마다 어느 다큐멘터리 영화의 흉내를 낸다. 네 번째 토막의 배우 용근은 최근 경력에 콤플렉스가 있어 혁권 못지않게 실없는 소리를 한다. 작품의 공식 소개문조차 이것들을 「괜한 소리, 흰 소리,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부른다. 어느 관객은 애매하게 시작하고 애매하게 끝난다고 썼다. 그 사람은 그래서 좋다고 했지만, 반대자는 같은 문장에서 멈출 것이다. 애매하게 시작하고 애매하게 끝나는 것은 보통 결함이라 불린다.

세 번째 반론. 제목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고 해 놓고, 재민은 누구도 구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구해지지 않는다. 전처 하라는 열 토막 내내 얼굴 없이 전화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일곱 번째 토막에서 카페에 새로 들어온 알바 모미는 일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해리성 정체 장애 증상을 보이고, 다음 토막에서는 「모미 베타」라는 이름으로 일찍 퇴근하려다 희본과 실랑이를 벌인다. 이 인물이 재민의 이혼과 무슨 상관인가.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변 인물은 주인공과 무관하게 이상하다. 이것은 구조가 아니라 산만함이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포스터

변호

받아들이는 것부터 적는다. 첫 번째 반론의 절반은 맞다. 이 작품은 다섯 분의 리듬으로 만들어졌다. 감독은 공개를 앞두고, 인터넷에 재미있는 동영상이 있어도 다섯 분이 한계라서 호기심에 클릭해 좋든 싫든 한 번은 보게 만들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어두운 극장에 78분 동안 앉혀 놓으면 리듬이 처지는 자리가 생긴다.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묶음」이라는 말은 비난이 아니라 설명이다. 이 작품은 애초에 영화가 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영화가 된 것은 나중 일이다. 토막 사이의 틈을 결함으로 셀지 숨 쉴 자리로 셀지는 보는 사람이 정한다. 나는 후자로 센다. 홍어 냄새와 전처의 전화가 한 토막에 놓인 것은, 둘 다 멀리서 와서 갑자기 코를 찌르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읽었다. 이것은 내 풀이다.

두 번째 반론에는 반박한다. 사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이미 끝났다. 이 작품의 사건은 이혼이고 그것은 첫 토막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났다.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사람 하나와, 그 사람 주변에서 사람들이 내는 소리다. 감독은 연출 의도에 이렇게 썼다. 헤어진 뒤에 비로소 시작된 재민의 서툰 사랑과, 그를 둘러싼 지인들의 한결같이 서툰 위로. 그리고 이 웃음들을 「여러분의 애도를 돕기 위해 일시적으로 고안된 웃음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부모의 정권 수다도, 누나 부부의 아침 흉내도, 용근의 실없는 소리도 소재가 아니라 주제다. 상처 입은 사람 옆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거의 전부 빗나간다. 이 작품은 그 빗나감을 열 번 반복해서 보여 준다. 다섯 번째 토막에서 배우 김정화가 단단히 심통이 나서 전화를 걸어 오는 것도 같은 줄에 있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에게 세상은 위로 대신 자기 사정을 건다. 흰소리가 많다는 반론은 정확한 관찰이다. 다만 그것은 이 작품이 실패한 지점이 아니라 이 작품이 다루기로 한 지점이다.

세 번째 반론에도 반박한다. 다만 절반만. 제목은 1980년의 한 프랑스 영화에서 빌려 온 것이고, 원제의 뜻은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에 가깝다는 풀이가 있다. 그러니 이 제목은 명령이 아니라 체념 섞인 농담이다. 아무도 너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뜻과, 전처의 이름 하라가 같은 글자 위에 겹쳐 있다. 구할 수 있는 자가 화면 밖에 목소리로만 있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라 설계다. 모미와 베타에 관해서는 다른 관객의 글이 도움이 되었다. 그 글은 이 작품에서 재민이 유일하게 평범한 인물이고 나머지가 모두 어딘가 이상해서 오히려 재민이 이상해 보인다고 썼다. 베타는 그 이상함의 가장 극단이다. 재민의 이혼과 무관하다는 지적은 맞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 하나가 비정상들 사이에 서 있는 그림 자체가 이 작품이 재민을 보는 방식이다. 무관함이 곧 배치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주인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재민은 한다. 오디션에 따라가고, 전화를 받고, 누나 집에 얹혀살고, 또 전화를 받는다. 그것이 전부라는 말은 그것이 적다는 뜻이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만큼인 사람의 이야기에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영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도 남는 것

반대자가 끝까지 옳은 부분이 있다. 열 토막을 다 보고 나서도 재민의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마지막 토막은 재민이 통화를 끝내고 절망한 자리에서 시작하고,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한마디씩 훈수를 둔다. 늘 그렇듯 괜한 소리들이다. 어느 관객은 이 마지막 장면이 뜬금없었지만 편안해졌다고 적었다. 뜬금없다는 말과 편안하다는 말이 한 문장에 있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정확한 요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 토막의 제목은 「150억년」이다. 공식 소개문은 그 괜한 소리, 흰 소리, 하나마나한 소리가 모이고 모여 우주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150억 년 전에 태어나 여전히 나이를 먹고 있는 이 우주. 위로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였다. 남는 것은 그 모임이다.

그래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다섯 분짜리 열 토막은 영화가 되는가. 나는 이제 그 질문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답하겠다. 감독은 공개 당시 이 시리즈가 더도 말고 만 명 정도만 꾸준히 보는 시리즈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숫자가 이 작품의 크기다. 영화가 되려고 하지 않은 것을 영화의 자로 재면 작게 나온다. 그 자를 내려놓으면, 괜한 소리로 가득한 78분이 뜬금없이 편안해지는 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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