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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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고 사는 두려움
우리가 흔히 두려움을 이겨 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대개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사라진 두려움과 데리고 사는 두려움은 다른 것이다. 앞의 것은 한 번의 사건이고, 뒤의 것은 하나의 태도다. 이기는 것은 상대를 없애는 일이지만 데리고 사는 것은 상대를 인정한 채로 걸음을 옮기는 일이다. 성장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대개 앞의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하고, 그래서 자주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나는 이 영화가 뒤의 것을 보여 주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왜 그런지를 말해 보려 한다.
라트비아의 감독이 블렌더라는 무료 프로그램으로 다섯 해 반에 걸쳐 만든 85분짜리 애니메이션이다. 대사가 한 줄도 없다. 사람은 흔적으로만 남은 세계에서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혼자 산다. 영화는 이 고양이가 출렁이는 강물 밑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한다. 고양이는 개들의 물고기를 몰래 물었다가 쫓기고, 사슴 떼에 떠밀리고, 곧이어 들이닥친 대홍수에 집을 잃는다. 고양이 모양의 거대한 조각상 위로 피했다가 지나가던 돛단배에 겨우 오르니, 배에는 카피바라가 먼저 와 있다. 그 뒤로 반짝이는 물건을 모으는 여우원숭이, 무리에서 떨어진 리트리버, 제 무리에게 배척당한 뱀잡이수리가 차례로 배에 탄다. 종이 다른 다섯 마리가 물길이 가는 대로 흘러간다.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라고 말해도 틀린 데는 없지만, 그렇게 말하면 이 영화가 한 일이 보이지 않는다.
초반에 고양이가 배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고양이는 배로 돌아가려고 허우적대다가 점점 가라앉고, 거의 익사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물속의 커다란 생물에게 떠밀려 수면으로 올라오고, 그 순간 새에게 낚아채여 하늘로 들어 올려진다. 새는 고양이를 배 위에 떨어뜨린다. 카메라는 끊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따라간다. 고양이는 이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구조는 전부 바깥에서 온다. 이것이 이 영화가 두려움을 다루는 첫 번째 방식이다. 두려움은 처음에 극복의 대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그 안에서 살아남게 되는 사건으로 나온다.

질문은 이것이다. 이 고양이는 두려움을 이겨 냈는가, 아니면 두려움을 데리고 사는 법을 배웠는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단순한 해피엔딩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고양이가 두려움에서 나아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깊은 곳에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 말을 겸손한 창작자의 의례적인 발언으로 읽지 않는다. 영화가 실제로 그렇게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영화는 두려움을 없애는 것과 데리고 사는 것을 구분하고, 분명하게 뒤쪽에 선다. 고양이는 처음에 물고기 떼가 눈앞을 지나가도 낚아채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앞발을 세차게 저어 헤엄을 치고,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다. 영화는 이 변화를 한 번의 결심으로 보여 주지 않는다. 배고픈 고양이에게 뱀잡이수리가 물고기를 은근슬쩍 던져 주는 장면이 먼저 있고, 그 뒤에 고양이가 스스로 물에 드는 장면이 있다. 말하자면 고양이는 물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무서운 물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하나 얻은 것이다. 두려움은 그대로이고 이유가 하나 늘었다. 나는 이것이 성장의 더 흔한 꼴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 영화는 데리고 사는 일이 혼자서는 되지 않는다는 데까지 간다. 뱀잡이수리를 보자. 이 새는 고양이를 해치려는 제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맞서다가 날개를 크게 다친다. 날지 못하게 된 새는 배의 뒷머리에 서서 키를 잡는다. 하늘의 것이 물 위의 조타수가 된 셈이다. 그리고 거대한 돌기둥에 이르렀을 때, 새는 폭풍 속에서 빛 쪽으로 날아올라 사라진다. 영화는 이것이 죽음인지 떠남인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뒤에 물이 빠지고, 땅이 갈라지고, 배에서 떨어져 나온 고양이가 유리 부표 하나에 매달려 떠 있다가 친구들과 다시 만난다. 요컨대 고양이가 물을 견디는 동안 곁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고, 그 누군가는 때로 사라진다. 두려움을 데리고 사는 법은 누군가에게서 배우지만, 그 누군가가 영원히 곁에 있지는 않는다. 이것이 첫째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간 자리다.

물론 이것은 동물들의 모험담일 뿐이고 거기에 성장이니 두려움이니 하는 말을 얹는 것은 보는 사람의 욕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대사가 없으니 그 빈자리를 해석으로 메우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대사가 없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인물의 선택을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오직 몸으로만 보여 줄 수 있다. 고양이가 물에 드는 장면은 고양이가 물에 드는 장면일 뿐이고, 그것은 해석 이전에 선택이다. 선택이 거기 있으니 성장도 거기 있는 것이다. 설명이 없다는 것은 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이 몸에 붙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을 보자. 물이 빠진 세계에서 고양이는 뭍에 올라온 고래 곁에 머문다. 고래는 홍수 속에서 고양이를 여러 번 도운 생물이다. 고양이는 고래를 살리지 못한다. 그저 곁에 있는다. 그리고 영화는 고양이, 카피바라, 리트리버, 여우원숭이 넷이 물웅덩이에 비친 제 모습을 함께 내려다보는 데서 끝난다. 영화의 첫 장면이 혼자 강물 속을 들여다보는 고양이였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 끝을 화해나 보상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혼자였던 것이 넷이 되었으니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첫 장면의 고양이가 본 것은 물 밑이었고, 마지막 장면의 넷이 보는 것은 물 위에 비친 제 얼굴이다. 물 밑을 보는 것은 거기 무엇이 있는지 살피는 일이고, 물 위에 비친 자기를 보는 것은 자기가 무엇이 되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 끝은 두려움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두려움을 데리고 여기까지 온 자기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보상이 아니라 확인이라고 나는 부르고 싶다.
이 영화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두려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성장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끝까지 고양이이고, 물은 끝까지 무서운 것이다. 달라진 것은 물이 아니라 물에 드는 이유와 물가에 함께 서 있는 이들이다. 나는 촬영이나 애니메이션의 기술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고, 이 영화의 그림이 왜 아름다운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이야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두려움을 이겨 내는 이야기 쪽이 아니라, 두려움을 데리고 사는 이야기 쪽에 서 있다. 그리고 그쪽이 우리가 실제로 사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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