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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바라는 왜 안 일어나는가

삐뚜름관람· 2026. 10. 13.· 2,915자

먼저 밝혀 두자면 나는 가만히 있는 걸 못한다. 불안하면 다리를 떨고, 다리를 떨다가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고, 열었다가 그냥 닫는다. 남들이 침착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건 타고난 거라고 투덜대면서 또 냉장고를 연다. 그게 다다.

아무튼 고양이 영화를 봤다. 사람이 다 없어진 세상에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혼자 산다. 어느 날 물이 차올라서 집이 통째로 잠기고, 고양이는 지나가던 낡은 돛단배에 겨우 올라탄다. 근데 배에 카피바라가 먼저 타 있다. 그다음에 반짝이는 것만 보면 끌어안는 여우원숭이가 타고, 무리에서 떨어진 리트리버가 타고, 제 무리한테 쫓겨난 뱀잡이수리가 탄다. 그리고 다섯이 물길 따라 떠내려간다. 85분 내내. 대사는 한 마디도 없다. 진짜로.

플로우 스틸컷

이게 얼마나 무서운 대본인지 아는가. 말을 못 한다. 표정도 사람 표정이 아니다. 그런데 85분을 끌고 가야 한다. 직장인한테 회의를 맡기면서 입은 열지 말고 몸짓으로만 진행하라는 거랑 비슷하다. 거기다 그림을 그린 사람 입장에서는 더 무섭다. 개랑 고양이는 집집마다 있다. 감독도 그래서 더 조심했다고 하더라. 고양이가 조금만 이상하게 움직이면 집에서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한테 바로 걸린다는 거다. 혼자서 다섯 해 반을 그렸다고 한다. 무료 프로그램으로. 나 같으면 반년쯤 그리다가 냉장고 열러 갔을 거다.

첫 장면부터 그렇다. 개들이 물고기를 놓고 서로 먹겠다고 싸운다. 바쁘다. 짖고 밀치고 난리다. 그러다 물고기 한 마리가 고양이 앞으로 툭 떨어진다. 고양이는 눈치만 보다가 그걸 몰래 물고 튄다. 바쁜 애들이 바쁘게 구는 동안 가만히 있던 애가 물고기를 먹는 거다. 나는 이 장면에서 벌써 이 영화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것 같아서 좀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할 게 없을 때 사람이 뭘 하게 되는지 생각해 봤다. 눈을 괜히 크게 깜빡이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하고, 꼬리를 한 번 더 흔들게 한다. 숨도 괜히 크게 쉬게 하고, 먼 데를 보게 한다. '나 지금 생각하고 있어요'를 몸으로 알려 주는 거다. 보는 사람은 그게 뭔지 모르면서도 뭔가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간다. 나도 회의 때 그렇게 넘어간다. 리트리버가 딱 그렇다. 꼬리를 살랑거리고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고 새로운 게 나타나면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던진 물건을 물고 와서는 또 던져 달라고 애원한다. 미워할 수가 없다. 나랑 제일 비슷해서 그렇다. 누가 봐 주지 않으면 불안해서 자꾸 뭘 하는 쪽. 여우원숭이는 반짝이는 걸 모으고, 남의 물건을 손으로 쳐서 떨어뜨린다. 고양이는 배를 스크래처로 쓰고, 여우원숭이 꼬리를 사냥감 삼아 논다. 다들 바쁘다. 다들 뭔가를 한다.

근데 카피바라는 안 한다. 고양이가 처음 배에 올라와서 온몸을 세우고 경계 태세를 잡는 장면이 있다. 못 만든 영화였으면 카피바라도 같이 긴장해 줬을 거다. 이 카피바라는 별생각 없이 킁킁거리다가 그냥 잔다. 리트리버가 놀자고 난리를 치고 여우원숭이가 물건을 떨어뜨리고 다녀도 반응이 없다. 영화 내내 이 친구가 하는 일이 자는 거다. 진짜로. 엄청나게 잔다. 깨어 있을 때는 킁킁거리며 냄새로 주변을 살피고, 먹을 게 있으면 먹고, 없으면 또 잔다. 경계심이라는 게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 위에서 제일 믿음직한 게 이 친구다. 나는 그게 부러워서 좀 화가 났다. 가만히 있는 걸로 화면을 버티는 거, 그거 제일 어려운 거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보는 사람이 안심한다. 얄밉다.

플로우 포스터

제일 좋았던 장면은 이거다. 여우원숭이가 아끼던 유리구슬이 물에 빠진다. 못 만든 영화였으면 여기서 카피바라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서 비장하게 뛰어들었을 거다. 음악도 깔렸을 거다. 이 카피바라는 그냥 물에 들어간다. 자다가 일어나서, 생색도 안 내고, 구슬 건지러 헤엄쳐 들어간다. 나는 그 '그냥'에서 졌다. 뱀잡이수리도 비슷하다. 고양이가 굶고 있으면 물고기를 은근슬쩍 던져 준다. 쳐다보지도 않고 던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근데 던져 놓고 아무 말이 없다. 당연히 없다. 새니까. 그래도 그게 좀 그랬다.

하나 더 얄미운 게 있다. 기사를 찾아보니 제작진이 카피바라 울음소리를 진짜로 녹음했는데, 캐릭터랑 안 맞아서 아기 낙타 소리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자기 목소리도 자기 게 아니다. 남의 소리를 빌려 쓰면서 영화에서 제일 든든한 거다. 나는 내 목소리로 내 얘기를 해도 이렇게 든든한 적이 없다. 회의 때 내가 뭐라고 하면 사람들이 한 번씩 다시 묻는다. 카피바라는 하품 한 번이면 끝난다. 진짜로.

친구가 물었다. "그래서 고양이가 말을 해?" 아니. "그럼 뭘 봐?" 카피바라가 자는 거. "그걸 85분 봐?" 응. "재밌어?" 응. "뭐가?" 몰라. 친구가 나를 좀 이상하게 봤다. 나도 내가 이상했다. 근데 설명을 못 하겠더라. 가만히 있는 걸 보는 게 왜 좋은지를, 가만히 못 있는 내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집에 와서 다시 생각해 봤는데도 답이 안 나왔다. 재밌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보는 동안 다리를 안 떨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긴 설명이다. 친구는 그래도 볼 거라고 했다. 고양이가 귀엽다길래. 뭐, 그것도 맞다. 들어가는 문은 아무거나 상관없다.

끝으로 가면 여우원숭이가 커다란 의자에 앉는다. 중간에 제 무리를 만났을 때도 결국 배로 돌아왔던 애다. 모아 둔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고 양반다리로 앉는다. 나는 그걸 보면서 웃었는데 웃고 나니까 또 좀 그랬다. 그 반짝이는 거 다 모으려고 영화 내내 뛰어다닌 애가 결국 앉는 거다. 가만히. 그렇게 보니까 이 영화는 전부 그 얘기였다. 뛰어다니는 애들이 하나씩 앉는 법을 배우는 얘기. 카피바라는 처음부터 알았고, 나머지는 배 위에서 배웠고, 나는 아직 냉장고 앞이다. 그래도 영화 보는 85분은 앉아 있었으니까 반은 배운 셈 치기로 했다. 뭐, 그렇게 치자.

다리 떠는 사람들아, 냉장고 열었다 닫는 사람들아. 오늘은 한 번만 그냥 앉아 있어 보자. 카피바라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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