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유나바머: 비밀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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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의서가 싫다
나는 동의서가 싫다. 긴 동의서는 더 싫다. 글자가 작아지는 동의서는 참을 수 없다. 맨 아래 '전체 동의'라고 적힌 네모를 보면 화가 난다. 세상의 모든 동의서는 읽히지 않으려고 만들어졌다. 읽히기를 바랐다면 저런 크기로 인쇄할 리가 없다. 나는 접수대에서 동의서를 끝까지 읽다가 뒷사람의 한숨을 들은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더 싫어졌다.
〈유나바머: 비밀 실험〉은 내가 오래 화가 나 있던 바로 그 종이를 찍는다. 1959년 하버드. 학부생 스물두 명이 토론에 참여한다는 정도의 설명을 듣고 서명한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토론 자리가 아니다. 맞은편에 젊은 법학도가 앉고, 학생이 미리 적어 낸 신념을 인신공격으로 무너뜨린다. 몸에는 센서가 붙고 얼굴은 촬영된다. 열여섯 살 수학 영재가 그 의자에 삼 년을 앉는다. 동의한 것은 토론이었고, 겪은 것은 심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 이 영화는 두 편이 억지로 한 몸에 붙어 있다. 한쪽은 1960년 전후의 하버드 지하실이고, 다른 쪽은 1990년대 FBI의 추적이다. 추적 쪽을 끌고 가는 여성 요원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영화가 만들어 넣은 사람이다. 실제로 선언문의 문장을 알아본 쪽은 수사기관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동생의 글버릇을 알아본 형과 형수가 있었다. 영화는 그 자리에 가공의 수사관을 앉혀 놓고 상당한 시간을 쓴다. 추적이 길어지면 긴장도 길어진다는 흔한 착각이 있다. 길면 그냥 길다.
대사도 자주 미끄러진다. 인물들이 설명을 너무 잘한다. 자기가 지금 무슨 상태인지를 본인 입으로 정리해 주는 대사를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 상태를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하물며 열여섯 살이다. 실제 인물이 훗날 그 연구가 자기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영화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한다. 노트에 '첫 번째 실험'이라고 적는 장면 뒤에 1996년의 폭탄 조립이 곧바로 붙는 대목에서는 나도 좀 불편했다. 저건 질문이 아니라 답안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이유는 하나다. 범행 현장을 옮겨 놨다. 보통 이런 영화는 몬태나의 오두막에서 시작한다. 장작, 등유 램프, 손으로 깎은 나무 상자, 창밖의 눈. 이 영화는 오두막에 무게를 싣지 않는다. 먼저 놓이는 것은 대학 건물의 어두운 방이다. 폭탄은 사건이 아니라 그 방의 나중 일처럼 찍힌다. 어느 쪽이 진짜 범죄 현장이냐고 영화가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질문의 각도가 마음에 든다.
교수를 그리는 방식도 좋다. 영화는 그를 괴물로 만들지 않는다. 전시에 사람 고르는 기술을 다듬었고, 성격을 재는 검사를 함께 만든 학자다. 그는 자기 이론이 맞다는 쪽으로 서서히 기울어 간다. 악당이 되는 게 아니라 연구자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정면으로 잡히는 얼굴 하나만으로 그 기울기가 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또렷한 선택이다.
나는 실화 범죄물이 폭탄을 다루는 방식을 견디지 못한다. 느리게 번지는 불길, 공중에 멈춘 유리 조각, 뒤에서 터지는데 끝내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 그 위로 먼저 울어 주는 음악. 전부 구걸이다. 이 영화에는 그게 없다. 폭탄은 스펙터클 자리에서 내려와 뒷일로 처리된다. 대신 카메라가 오래 보는 것은 의자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다. 터지는 것을 보여 주는 대신 터지기 전의 방을 보여 주겠다는 쪽. 나는 이 선택에 표를 준다.
영화는 이 소년에게 폭발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책상을 뒤엎지 않고, 울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다. 그냥 앉아 있다가 다음 주에 또 온다. 밋밋하다고 적은 평도 봤다. 나는 그쪽이 맞다고 본다. 망가지는 일은 대개 한 번에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는 동안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소리가 나는 쪽은 삼십 년 뒤다.
음모론으로 빠지지 않는 것도 좋다. 이 실험 이야기에는 늘 냉전기 비밀 계획의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정보기관이 대학 연구에 돈을 댔다는 사실은 남아 있고, 이 교수가 그쪽과 인연이 있었던 것도 맞다. 다만 그 돈이 이 연구로 흘렀다는 문서는 아직 없다. 영화는 거기서 멈춘다. 멈출 줄 아는 실화물은 드물다. 확실한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불쾌하다는 걸 아는 영화다.
연구의 품위란 자기가 보고 싶은 결과를 못 본 척할 줄 아는 것이다. (물론 그걸 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품위라는 말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지하실에서 보여 주는 것은 잔인함이 아니라 품위가 빠져나가는 속도다. 처음에는 연구였고, 다음에는 관찰이었고, 나중에는 확인이 된다. 서명을 받아 두었으니 절차는 끝까지 깨끗하다. 동의서의 쓸모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절차를 보호한다.
물건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방에 놓인 것은 긴 탁자 하나, 스탠드 마이크 두 대, 등받이가 낮은 접이식 의자,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하나다. 손목에 감기는 띠가 있고 선이 바닥으로 늘어진다. 나는 이 선택이 맞다고 본다. 무엇 하나 고문 도구처럼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실 비품으로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진짜 공포다. 저 방을 하얀 유리벽 연구소로 꾸미고 모니터를 세워 놨다면 나는 이 영화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스터에 적힌 문구는 재능이 끝나는 곳에서 광기가 시작된다는 식의 말이다. 나는 이런 문구가 싫다. 재능과 광기를 한 줄에 묶어 파는 버릇이 싫고, 그 버릇이 아직도 먹힌다는 사실은 더 싫다. 정작 영화 안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장면들은 그 문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재능은 끝나지 않았고 광기는 시작되지 않았다. 서명을 받은 사람과 서명을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홍보 문구가 영화보다 멍청한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그리고 그 문구를 보고 영화를 고르는 사람도 흔하다.
지루한 구간이 있다. 좋은 구간도 있다. 둘은 모순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절반을 지겨워하면서 나머지 절반에 설득됐다. 추적물로는 평범하고, 방 하나를 찍은 영화로는 꽤 단단하다. 어느 쪽을 보러 갈지는 각자 정하면 된다. 다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휴대폰의 약관 화면을 한참 내려 봤다. 끝까지 읽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동의서가 싫고, 이제는 '동의합니다' 옆의 그 작은 네모까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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