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04
21 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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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를 섞어 놓고 패를 먼저 보여 주는 영화
21그램. 5센트 동전 다섯 개의 무게다. 초콜릿 바 하나, 벌새 한 마리의 무게이기도 하다. 사람이 죽는 순간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그 무게를, 영화는 끝나기 몇 분 전에야 죽어 가는 남자의 목소리로 알려 준다. 두 시간을 기다려서 받는 답이 그거다. 나는 그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왜 이걸 맨 뒤에 두는가.
내가 영화에서 질색하는 것부터 적는다. 시간을 카드처럼 섞어 놓는 편집. 제목의 뜻을 마지막에 가서야 풀어 주는 버릇. 교통사고 한 번으로 모르는 사람 셋을 묶는 구성. 죽은 사람의 장기를 받은 사람이 그 가족을 찾아가는 설정. 그리고 복수를 끝까지 완성해 주는 결말. 다섯 개다. 이 영화는 앞의 넷을 전부 저지르고 마지막 하나만 피한다. 넷을 저지르는 방식과 하나를 피하는 방식이 서로 붙어 있어서, 따로 떼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순서대로 간다.
섞기부터. 첫 장면은 침대다. 심장이 아픈 수학 교수와 어떤 여자가 같이 누워 있고 여자는 자고 있다. 이게 이야기의 거의 끝이다. 영화는 끝에서 시작해 처음과 중간을 아무 데나 흩뿌린다. 어떤 글은 장면 하나하나가 거의 무작위로 배치된 것 같다고 했고, 나도 그렇게 봤다. 앞뒤가 맞춰지는 데 이십 분 넘게 걸린다. 그동안 관객이 하는 일은 사람 얼굴을 외우는 것뿐이다. 트럭에 예수 문구를 칠하고 다니는 전과자. 남편과 두 딸을 둔, 수영장에 다니는 여자. 산소 호흡기를 떼고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교수. 셋이 서로 무슨 사이인지 영화는 한참 알려 주지 않는다.

시간 순서대로 펴면 이렇다. 전과자가 운전하던 트럭이 여자의 남편과 두 딸을 치고 달아난다. 아이들은 그 직전까지 비둘기를 쫓고 있었다. 남편의 심장은 교수에게 이식된다. 교수는 자기 심장이 누구 것이었는지 알아내고 여자를 찾아간다. 여자는 약으로 돌아가고, 교수와 가까워지고, 전과자를 죽여 달라고 한다. 이렇게 적어 놓으면 흔한 이야기다. 뺑소니, 이식, 복수. 섞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중간에 껐을 것이다. 그러니 섞기는 기교가 맞다. 기교인데 이유가 있는 기교다. 영화가 침대 장면을 맨 앞에 둔 순간 관객은 결과를 안다. 저 둘은 결국 한 침대에 눕는다. 그러면 남는 질문은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가 된다. 복수극이 아니라 경위서가 된다. 나는 복수극보다 경위서가 좋다.
전과자 이야기가 제일 오래 남는다. 그는 문신 때문에 골프장 캐디 일에서 잘린다. 교회에서 사람들과 강처럼 평화로운 마음을 노래한다. 아이들을 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몸을 섞다가 멈춘다. 그 애가 나를 똑바로 봤다고 말한다. 영화는 이 남자를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봐주지도 않는다. 자수하겠다는 그를 아내가 말리고, 그는 끝내 자수한다. 믿음은 감옥에서 무너진다. 그런 사람이 뒤에 나오는 모텔에 있다.
여자의 장면 중에서는 빨래가 남는다. 죽은 아이들 옷을 세탁기에 넣다가 딸의 빨간 운동화 끈을 오래 본다. 영화는 거기서 아무 설명도 붙이지 않는다. 끈이 빨갛다는 것만 보여 준다. 이 정도면 됐다. 슬픔을 설명하는 영화는 슬프지 않고, 운동화 끈을 보여 주는 영화는 슬프다.
이제 마지막 하나, 영화가 피한 것. 교수는 탐정에게 총을 사고 여자와 모텔에 든다. 전과자를 공터로 끌고 가 총을 겨눈다. 그리고 못 쏜다. 땅에 세 발을 쏘고 그냥 사라지라고 말한 뒤 돌아와서 여자에게 죽였다고 거짓말을 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여기서 끝이다. 쏘든 안 쏘든 결론이 난다. 이 영화는 전과자가 제 발로 모텔 방에 돌아오게 한다. 자기를 쏘라고. 여자는 전등으로 그를 때리고, 교수는 심장이 멈춰 가는 와중에 총을 집어 자기 가슴에 쏜다. 복수하러 간 자리에서 복수 대상이 죽기를 원하고 복수하는 사람이 자기를 쏜다. 이보다 더 복수를 망쳐 놓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전과자는 자기가 쐈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맞지 않는 진술이라 풀려난다. 여자는 교수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죽은 딸의 방을 조금씩 손보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섞기가 없었으면 이 결말은 서지 않았을 것이다. 순서대로 봤다면 관객은 모텔까지 두 시간 동안 저 남자가 벌받기를 기다렸을 테고, 벌을 안 주는 결말에 화를 냈을 것이다. 섞어 놓으니 관객은 기다릴 수가 없다. 벌받는 장면과 사고 장면과 침대 장면을 같은 십 분 안에 보니까 누구 편을 들 틈이 없다. 편을 못 드니 복수가 안 되는 결말이 억울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섞기는 결말을 위한 알리바이다. 나는 그 점을 평가한다.
나는 영혼이라는 말이 저울에 올라가는 게 싫다. 21그램이라는 숫자는 백 년도 더 된 실험에서 나온 것이고, 그 실험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고들 한다. 영화도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숫자를 끝에 두니 숫자가 아니라 질문이 된다. 그 무게에 무엇이 들어가느냐고 죽어 가는 남자가 묻는다. 영화가 처음부터 이 말을 했다면 나는 설교로 들었을 것이다. 끝에 두니 유언으로 들린다. 제목을 끝에 푸는 버릇이 싫다고 위에 적었다. 이 영화는 그 버릇을 저지르고도 봐줄 만한 몇 안 되는 경우다. 싫은 것을 네 개나 저지르는데 좋았다. 모순이 아니다. 저지르는 방식이 다 이유가 있으면 저지른 게 아니다.
마지막 장면은 모텔의 빈 수영장이다. 눈이 내린다. 앞에서 여자는 수영장이 자기를 살게 한다고 말했었다. 그 수영장에 물이 없다. 영화가 두 시간 동안 섞어 놓은 카드가 거기서 한 장으로 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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