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3

날아올라라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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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 사유가 교본에 없었다

예민한책장· 2026. 10. 27.· 2,741자

이 드라마를 주말마다 챙겨 본 친구가 있다. 미용실 이야기라면 무조건 보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뒤늦게 몰아 봤고, 다 보고 나서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래는 그 통화를 기억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작품 속 사실은 방송과 기사로 확인한 것만 적었고, 친구의 말은 친구의 것이며 틀린 말이 있으면 내 것이다.

나 먼저 고백하겠다. 나는 이 드라마를 로맨스 교본 대조용으로 봤다. 소심한 인턴, 능글맞은 막내, 술김의 고백, 거절, 이불킥, 재고백, 어중간한 사이, 첫 키스, 의문의 여자, 입대. 수순을 열 개 적어 놓고 하나씩 지워 나갔는데 아홉 개가 지워졌다.

친구 그렇게 보면 세상 모든 드라마가 지워진다. 너는 1회에서 손님이 기쁨 씨 눈빛이 기분 나쁘다고 담당을 바꿔 달라 하는 장면도 수순에 넣었냐.

나 그건 수순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가 남은 것이다. 미용실 인턴이 손님한테 눈빛으로 퇴짜를 맞는 장면은 내가 아는 어느 교본에도 없다. 그 장면 하나로 이 인턴장께서 어떤 분인지 다 알았다. 경력 5년에 아직도 손님 앞에서 말이 안 이어지는 분이다.

친구 그러면 4회 고백은 왜 수순이라고 하냐. 고백하고 거절당하는 건 수순이지만, 거절 이유가 교본에 있었냐.

나 「난 처음 연애하는 사람은 좀」. 그 대사 말이지.

친구 그렇다. 보통은 지금은 누굴 만날 때가 아니라거나, 좋은 사람 만나라거나다. 이 사람은 상대가 처음 연애하는 사람이라서 안 되겠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앞에 붙이고 바로 그 이유를 댄다. 나는 그 한 줄에서 무열 씨가 겁쟁이라는 걸 알았다. 능글맞은 건 겉이고, 처음 연애하는 사람을 책임질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나 나는 반대로 읽었다. 그 거절은 재고백을 받기 위한 길 닦기다. 거절당한 다음 날 이불을 발로 차고, 출근해서 피해 다니다가, 결국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고 다시 고백한다. 거절이 약했으니까 하루 만에 뒤집힌 것이다. 교본에서는 이걸 「1차 거절은 가볍게」라 한다.

친구 교본은 누가 쓴 건데.

나 알 도리가 없다. 아무튼. 그 뒤가 더 교본이다. 5회의 열쇳말이 「거지존」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 길이를 두 사람 사이에 갖다 붙였다. 미용실 드라마가 머리 용어를 관계에 끌어다 쓰는 건 예상 수순 1번이다.

친구 그런데 그 회에서 기쁨 씨가 하는 일이 수순이냐. 질투 작전을 한다면서 동료에게 먼저 작전이라고 말해 놓고, 고향 오빠한테 애교를 부리다가, 결국 당사자 앞에서 이제 안 좋아한다고 말한다. 작전을 선언하고 시작하는 밀당이 교본에 있냐.

나 「밀당」 항목에 있다. 다만 이분의 밀당은 구수하다. 보통 밀당은 티가 안 나야 하는데 이분은 작전이라고 공표하고 시작한다. 그 점은 인정하겠다.

날아올라라 나비 포스터

친구 6회 회식은.

나 그건 내가 할 말이 없다. 사귄 지 한 달 된 사람이 회식 자리에서 만난 지 얼마 만에 같이 자느냐고 묻고, 원장께서 1년쯤이라고 둘러대고, 디자이너 한 분은 네가 하고 싶으면 처음 만난 날에도 하는 거고 싫으면 10년이 지나도 안 하는 거라고 답한다. 그 답은 교본에 없다. 교본에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친구 그리고 영화관 장면.

나 「난 준비된 몸이니까」. 그 대사는 내가 적어 뒀다. 두 시간 내내 상대 손만 생각했다는 고백을 받고 하는 대답이 그것이다. 민간인으로서 평하건대 저 대사는 다른 드라마에서 쓰면 사고가 난다. 이 드라마에서는 먹힌다. 왜 먹히는지는 모르겠다.

친구 상대가 처음 연애하는 사람이니까 먹힌다. 겁내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농담으로 내놓는 거다. 손잡고 싶으면 잡고 키스하고 싶으면 하라고, 속도를 전부 상대에게 넘긴다. 4회의 거절과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이다. 처음 연애하는 사람은 좀 그렇다던 사람이, 처음 연애하는 사람의 속도에 자기를 맞추기로 한 거다. 나는 그래서 거절 대사가 중요하다고 한 거다.

나 거기까지는 내가 졌다. 그런데 마지막은 안 봐주겠다. 10회에 입영 통지서가 온다. 사귀고, 키스하고, 8회에 클럽에서 만났다는 여자분이 미용실에 찾아와 오해가 생기고, 그게 풀리고, 그러면 다음은 떨어져야 한다. 드라마가 커플을 떼어 놓을 때 쓰는 가장 구수한 장치가 군대다. 통지서 한 장이면 아무도 나쁜 사람이 안 된다.

친구 나는 거기서 울었다.

나 울라고 만든 장면에서 울었다고 자랑하면 어쩌자는 건지.

친구 입대 전날 헤어지는 장면 때문이 아니다. 그 뒤에 새 인턴이 들어오는 장면 때문이다. 무열 씨가 빠진 자리에 싹싹하고 눈치 빠른 사람이 들어와서 미용실이 그냥 돌아간다. 원장도 수리 씨도 우 선생도 각자 자리에서 손님을 받는다. 그게 이 드라마의 끝이다. 커플이 끝이 아니다. 사람이 나가도 미용실은 영업을 한다는 것이 끝이다.

나 그러면 입대는 왜 필요한데.

친구 사람이 나가야 미용실이 돌아간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으니까. 네 말대로 아무도 나쁜 사람이 안 되는 방법으로 사람 하나를 빼낸 거다. 수순이라고 해도 좋다. 수순을 쓴 이유가 다르다.

나 그러니까 너는 이 드라마가 연애물이 아니라 직장물이라는 거냐.

친구 머리하는 집 이야기다. 사람이 와서 머리를 바꾸고 간다. 인턴도 그렇게 왔다가 간다.

나 머리는 다시 자란다는 소리를 하려는 거면 참아 달라.

친구 안 할 거였다. 네가 했다.

통화는 거기서 끊겼다. 합의한 것은 하나다. 4회의 거절 사유는 교본에 없었다는 것. 나머지는 각자 집으로 가져갔다. 아직 안 보신 분들께 드리는 말씀은 이것이다. 수순을 세며 보셔도 되고 사람을 보며 보셔도 된다. 다만 1회의 눈빛 장면만은 꼭 보시기 바란다. 거기서 이 드라마가 어느 쪽인지 각자 정하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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