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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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장면이 없는 죽음 영화를 누가 봐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 이 영화는 죽음을 다루지만 죽는 장면이 없다. 병실은 나와도 피 한 방울, 비명 한 번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견디기 쉬운 죽음 영화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영화다. 당신이 어느 쪽인지 아래에서 가려 보자.
설정만 먼저. 작가 잉그리드는 책 사인회에서 옛 동료 마사가 암으로 입원했다는 말을 듣는다. 병실에서 다시 만난 마사는 종군기자였고, 치료가 실패했고, 스스로 끝낼 약을 구해 놓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탁한다. 그날 옆방에 있어 달라고. 두 사람은 뉴욕 외곽 숲속의 집을 빌려 들어간다. 2층 마사의 방문은 빨간색이다. 열려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닫혀 있으면 끝난 것이다. 여기까지는 줄거리 소개에 다 나오는 이야기다. 스페인 감독이 처음 영어로 찍은 영화고, 베네치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그 두 사실이 당신의 기대를 올린다면, 그 기대는 반쯤만 맞는다. 상을 받을 만큼 단단한 영화지만, 상을 받은 영화들이 흔히 주는 큰 장면은 없다.
보라 — 스포일러 없는 구간
- 누군가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 잉그리드는 매일 아침 계단을 오르다 멈춰 서서 그 문을 올려다본다. 그 동작 하나가 이 영화의 전부다. 당신은 그 계단을 안다.
- 말로 하는 영화를 견딜 수 있는 사람. 병실에서 마사는 자기가 말이 너무 많은지 묻는다. 그리고 계속 말한다. 딸의 아버지 이야기, 전쟁터 이야기. 영화는 그 이야기를 화면으로 거의 보여 주지 않고 마사의 입으로 전한다. 듣는 영화다.
- 색을 보는 사람. 빨간 립스틱, 초록 코트, 빨간 문, 그리고 마지막 날 마사가 꺼내 입는 노란 재킷. 죽음을 앞둔 영화가 이렇게 밝은 옷을 입는다. 그 선택이 무슨 뜻인지 보는 동안 계속 생각하게 된다.
- 묻지 않고 곁에 있는 법을 아는 사람. 잉그리드는 부탁을 받고 망설이지만, 받아들인 뒤에는 왜냐고 묻지 않고 말리지도 않는다. 두 사람은 빌린 집에서 한 달 가까이 가볍게 먹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신다. 그게 전부인 날들이 이 영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당신이 그런 날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당신 것이다.
- 우정이 사랑보다 오래 간다고 믿는 사람. 두 사람은 같은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남자 데미안이 다시 나오는데, 영화는 그를 질투의 재료로 쓰지 않는다. 변호사를 구해 주는 사람으로 쓴다. 그게 이 영화의 태도다.
피하라 — 스포일러 없는 구간
- 사건을 기다리는 사람. 중반에 마사가 약을 아파트에 두고 왔다는 걸 알고 두 사람이 뉴욕으로 돌아가 집을 뒤지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사건이 그것이다. 추격도 반전도 없다.
- 대사가 책처럼 들리면 못 견디는 사람. 눈 오는 밤에 마사는 오래된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외운다. 한 번이 아니다. 데미안은 기후 위기 앞에서 시가 무슨 소용이냐고 하고, 잉그리드는 비극 안에서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답한다. 사람이 저렇게 말하나 싶으면, 당신은 끝까지 그 생각을 하게 된다.
- 지금 가까운 사람의 병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 이 영화는 아프게 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이 아직 내리지 못한 결정을 두 사람이 아주 침착하게 내리는 걸 보여 준다. 그게 더 힘들 수 있다. 미루는 것도 방법이다.
- 잘 죽는 법을 배우러 가는 사람. 영화는 마사의 선택을 옹호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답을 받으러 가면 빈손으로 나온다.
- 인물이 설명되길 바라는 사람. 마사가 왜 전쟁터를 떠돌았는지, 딸과 왜 멀어졌는지는 마사의 입으로만 나온다. 그 말이 사실인지 영화는 확인해 주지 않는다. 화자의 말을 믿지 못하면 당신은 107분 내내 증인 없는 재판을 보는 기분일 것이다.
여기부터 결말
빨간 문은 두 번 닫힌다. 첫 번째는 바람 때문이다. 잉그리드는 닫힌 문을 보고 무너지고, 돌아보면 통유리 너머에 마사가 서 있다. 마사는 그걸 예행연습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진짜다. 잉그리드는 마사를 집 밖 긴 의자에서 찾는다. 노란 재킷을 입고 있다.
첫 번째 닫힘과 두 번째 닫힘 사이에 당신이 봐야 할 것이 있다. 예행연습 뒤에 두 사람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마사는 계획을 거두지 않고, 잉그리드는 떠나지 않는다. 데미안이 소개한 변호사와 미리 말을 맞춰 둔 것도 그 사이의 일이다. 부당한 일이 아니라 예정된 일 앞에서, 두 사람은 각자 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영화가 보여 주는 건 그 준비뿐이다.
그다음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경찰이 온다. 잉그리드는 예측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경찰은 믿지 않는다. 마사가 잉그리드보다 먼저 다른 친구에게 같은 부탁을 했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쓰인다. 그리고 마사의 딸 미셸이 온다. 어머니와 같은 얼굴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잉그리드와 미셸을 그 긴 의자에 나란히 눕히고 눈을 내린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마사는 갔고 잉그리드는 남았다. 영화는 잉그리드가 그 뒤에 무엇을 하는지 보여 주지 않는다. 경찰 앞에서 버틴 것, 어머니와 같은 얼굴을 한 딸 옆에 누운 것, 그게 전부다. 아마 그 전부가 당신이 이 영화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일 것이다.
둘 다 아닌 사람에게
볼까 말까 망설이는 당신. 107분이다. 끊지 말고 한 번에 보라. 중간에 끊으면 계단을 오르는 동작이 지루해지고, 한 번에 보면 그 동작이 무서워진다. 이 영화는 후자로 봐야 한다. 그리고 보고 나서 누구에게도 설명하려 하지 마라. 설명이 안 된다. 그게 이 영화가 당신에게 남기는 유일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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