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룸 넥스트 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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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자를 보냈고, 잉그리드는 병원에 갔다

삐뚜름관람· 2026. 10. 29.· 2,147자

작년 겨울에 친한 선배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문자를 보냈다. 몸 괜찮으냐고, 조만간 가겠다고. 조만간은 오지 않았고 선배는 두 달 뒤에 퇴원했고 나는 아직도 그 병원이 어디였는지 모른다. 병원 복도 냄새가 싫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아픈 사람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안 간 거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좀 그랬다. 내 얘기를 하는 영화라서.

아무튼 룸 넥스트 도어를 봤다. 유명 작가 잉그리드가 책 사인회에서 옛 동료 마사가 암으로 입원했다는 말을 듣는 데서 시작한다. 잉그리드가 막 낸 책이 하필 죽음이 무섭다는 이야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이야기다. 무서워서 책으로 써 버린 사람. 여기까지 보고 나는 속으로 반가웠다. 저 사람도 겁쟁이구나. 그러면 나처럼 문자나 보내고 말겠구나.

아니었다.


책을 쓴 사람과 옆방에 있는 사람은 보통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 둘이 같은 사람이 되는 걸 이 영화에서 처음 봤다. 사인회에 줄을 선 사람들은 죽음이 무섭다는 책을 사 가고, 그 책을 쓴 사람은 그날 병실에 앉아 진짜 죽음 얘기를 듣는다. 쓰는 것과 듣는 것 사이의 거리가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잉그리드는 사인회에서 소식을 듣고 병실로 간다. 적어도 화면에는 망설이는 시간이 없다. 병실에서 마사는 긴 이야기를 한다. 전쟁터를 다닌 기자였다는 것, 치료가 실패했다는 것, 딸 이야기. 잉그리드는 그걸 다 듣는다. 그리고 얼마 뒤 부탁을 받는다. 치료를 그만두고 스스로 끝낼 날을 정했으니, 그날 같은 방 말고 옆방에 있어 달라고.

룸 넥스트 도어 스틸컷

여기서 잉그리드가 한 첫 번째 일은, 내가 했을 법한 말을 하는 것이다. 더 가까운 사람은 없냐고. 몇 년이나 연락이 끊겼던 사이 아니냐고, 딸은 어떠냐고. 치료를 끝까지 받아 보자는 말도 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화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정상이지. 겁쟁이의 정상.

그런데 잉그리드는 그 말을 다 하고 나서 간다. 이게 나와 다른 점이다. 나는 핑계를 대고 안 갔고, 잉그리드는 핑계를 입 밖에 꺼내 놓고도 갔다. 죽음이 무서워서 책까지 쓴 사람이, 무섭다는 걸 숨기지 않은 채로 짐을 싸서 숲속 집으로 들어간다. 겁이 없어진 게 아니다. 겁을 들고 간 거다. 그 집에서 두 사람은 옛 애인 얘기를 하고, 마사가 쫓아다닌 전쟁 얘기를 하고, 책방에도 간다. 잉그리드는 그 사이사이에도 죽음 얘기가 나오면 몸을 사린다. 그래도 나가지 않는다. 나가지 않는 것이 이 사람이 하는 일의 전부다.

두 번째 일은 더 작다. 그 집 근처 체육관에서 잉그리드는 트레이너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다. 친구가 곧 죽는다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 무너진다. 트레이너는 위로를 하려다가, 회원과 몸이 닿으면 안 된다는 규정 때문에 안아 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웃었다. 이 영화에서 제일 웃긴 장면이면서 제일 아픈 장면이다. 안아 주고 싶은데 규정 때문에 못 하는 사람과, 가 보고 싶은데 겁 때문에 못 가는 나 중에 누가 더 못났는지는 쓰지 않겠다.

마사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을 잉그리드는 남에게 한다. 아마 그래야 마사 앞에서는 멀쩡한 얼굴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건 내 짐작이다. 영화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체육관을 나온 잉그리드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만 보여 준다. 울 데는 밖에 두고, 있을 데는 안에 두는 사람. 나는 둘 다 밖에 두는 사람이다.

룸 넥스트 도어 포스터

잉그리드는 옛 애인이기도 한 작가 친구를 만나 변호사까지 미리 구해 둔다. 겁 많은 사람이 하는 준비다. 나는 이 대목이 좋았다. 용감한 사람은 준비를 안 한다. 겁 많은 사람이 끝까지 가려면 변호사가 필요하다.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선배한테 전화를 걸까 말까 하다가 걸지 않았다. 대신 이 글을 쓴다. 이것도 핑계라는 걸 안다.

잉그리드가 대단한 사람이어서 간 게 아니라는 게 이 영화의 요점이라고 나는 읽었다. 겁이 많고, 처음엔 딴 사람을 추천하고, 체육관에서 남 앞에서 운다. 그런 사람이 끝까지 옆방에 있었다.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냥 갔기 때문에 있었던 거다. 가는 일과 대단한 일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나는 마흔 넘어 영화를 보고 배운다. 배우고도 안 가면 그건 또 다른 문제지만.

부럽고 얄밉다. 나보다 겁이 덜한 것도 아닌데 결과가 다르다는 게 제일 얄밉다.

잉그리드, 당신이 이겼다. 선배, 이번 주에 간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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