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 2026

더 커뮤니티 2: 보이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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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 문항은 어디로 갔나

활보러· 2026. 11. 04.· 3,037자

이 설정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둘이었고, 프로그램은 셋째 길로 갔다. 그 길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들어갈 때 손에 쥐고 있던 것 하나를 길 위에 놓고 갔다.

설정은 이렇다. 「더 커뮤니티 2: 보이지 않는 손」은 웨이브가 2026년 9월 4일부터 10월 9일까지 열 편으로 내놓은 서바이벌이고, 연출은 권성민·이지훈·김정훈이다. 참가자 열세 명이 화이트·블루·레드·블랙 네 그룹으로 나뉘어 8박 9일을 살고, 닷새째에 골드라는 다섯째 그룹이 들어온다. 화이트는 상금 2억이 될 보석을 찍고, 블루에는 정보를 조회하는 기술이, 레드에는 폭탄을 만드는 기술이 걸려 있고, 블랙은 한 사람이 마트를 열어 음식과 정보를 쥔다. 하루에 라이프 하나씩을 내야 살아남고, 거래가 안 되면 전쟁을 할 수 있다.

들어가기 전에 참가자들은 서른일곱 문항짜리 시험을 친다. 개인 차원에서 의미와 실리, 사회 차원에서 구조와 능력, 윤리 차원에서 원칙과 결과. 세 축에서 어느 쪽에 서는지가 코드가 되어 각자에게 붙는다. 공개된 개인 포스터에서는 그 코드가 적힌 손 부분이 투명하게 지워져 있었다. 이 숫자를 기억해 두면 좋다. 서른일곱.

이런 설정이 보통 가는 길은 둘이다. 하나는 경제 교실이다. 비교우위, 무역, 인플레이션, 화폐 발행, 기축통화. 연출진이 인터뷰에서 다뤘다고 밝힌 개념들이 그대로 목록이다. 발행권을 가진 쪽이 돈을 찍고, 찍을수록 값이 내리고, 작은 그룹들이 그 사이에서 중개로 먹고사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된다. 제목이 그 길을 가리키고 있다. 각자 제 이익을 챙기는데 전체가 돌아간다는 그 손. 다른 하나는 전 시즌의 길이다.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한방에 넣고 명제를 두고 싸우게 하는 것. 이번 시즌에도 그 잔재가 있다. 다수편승게임이라고, 날마다 명제 하나에 찬성과 반대로 갈라서는 게임인데 말을 하면 바나나라는 보상이 나온다. 서른일곱 문항은 이 길을 위해 있는 장치처럼 보였다.

프로그램은 둘 다 아닌 쪽으로 갔다. 전쟁이다. 연출자는 시즌 1에서 출연자 대 제작진의 구도가 생기는 걸 보고 이번에는 군수업자를 넣었다고 적었다. 다른 출연자들이 서로를 공격할 때만 상금을 얻는 사람. 반대로 모두가 투명하게 협력해 그를 내보내면 그의 상금은 0이 되는 구조다. 그러니까 이 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반대편에 서 있는 건 보이는 손 하나다. 마트를 열고 전쟁 비용을 받는 사람. 거래가 외교가 되고 외교가 실패하면 전쟁이 되는 순서를 만들어 놓고, 그 순서가 돌아가게 기름을 치는 사람을 한 명 심어 둔 것이다. 이지훈 연출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키워드가 딜레마였다고 했고, 권성민 연출은 국제법과 협약이 있어도 이를 강제할 상위 기관이 없고 힘 있는 쪽이 지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경제 교실이 아니라 국제정치 교실이었다.

더 커뮤니티 2: 보이지 않는 손 포스터

이 선택이 낳은 장면 둘.

하나는 골드가 들어온 날 벡터가 「금본위제」라는 말을 꺼낸 장면이다. 연출자가 뒤에 쓴 글에 따르면 제작진은 그 순간 미리 준비한 규칙 카드가 어디서 유출된 줄 알고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순수한 추측이었다. 편집에서는 혼동을 막으려고 잘못 짚은 발언까지 함께 넣었다고 했다. 설정이 참가자 머릿속에서 제작진보다 먼저 굴러간 순간인데, 나는 이 장면이 이 시즌에서 설정이 가장 잘 작동한 자리라고 본다. 규칙을 한꺼번에 알려 주지 않는 이유를 연출자는 미래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 현재에 몰입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적었다. 금본위제 발언은 그 말이 맞았다는 증거다. 모르니까 추론했고, 추론이 규칙을 앞질렀다.

다른 하나는 마지막 회에서 마이야르가 전쟁을 앞두고 계속 갈등하는 장면이다. 연출자는 이 장면을 이 프로그램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라고 했다. 다른 자리에서는 그가 다른 그룹 숙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을 문장만 두고 우회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도 적었다. 전쟁을 하라고 짠 판에서 전쟁을 머뭇거리는 사람이 가장 오래 찍힌다. 설정이 바란 것이 전쟁이 아니라 전쟁 앞의 망설임이었다면, 여기까지는 됐다.

그리고 결말. 골드 그룹이 전부 나가고 한 사람만 남았는데, 마지막 날 규칙이 화이트와 골드에 마지막 발행과 공격권 구매를 열어 줬다. 혼자 남은 골드가 골드를 1조 개 가까이 찍고 그걸로 공격권을 수천 장 사서 다른 사람들의 투표권을 지웠다. 연출자는 시뮬레이션에서는 모든 그룹이 양쪽 화폐를 조금씩 쥐고 블루나 레드가 상금을 가져가는 그림이 반복됐다고 했고, 골드가 완전히 배제되고 블루와 레드가 캐스팅 보터로서 심리전을 전혀 하지 않는 전개는 변수에 넣지 못했다고 했다. 이 결말을 두고 할 말은 이미 많이 나왔다. 나는 다른 데를 본다.

서른일곱 문항으로 돌아간다. 이 코드가 열 편 동안 한 일을 세어 봤다. 포스터에서 손을 지우는 일. 다수편승게임에서 찬반을 가르는 일. 그리고 마지막 날, 공격권으로 누군가를 지목했을 때 맞혀야 하는 정답이 되는 일. 사람의 가치관이 암호가 됐다. 윤리 차원에서 원칙 쪽에 선 사람이 거래에서 약속을 더 지키는지, 사회 차원에서 구조 쪽인 사람이 원조 안건에 더 손을 드는지, 그런 걸 볼 수 있는 판이었다. 리더 협의에서 원조와 제재를 결정하는 자리가 날마다 있었으니 재료는 있었다. 연출자 본인이 두 번째 입장문에서, 이해관계를 통한 견제에 집중한 나머지 프로그램 전체를 이끌어 온 다수편승이 힘을 잃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썼다. 다수편승게임의 질문도 출연자 행동을 고려해 선정했다고 인정했다. 가치관을 재료로 들여놓고 돈이 그 위를 덮었다. 덮인 쪽이 아깝다.

그룹을 짤 때 성별이 아닌 다른 요소로 정치적 관계가 만들어지길 바라서 팀별 성비를 조정했다는 말도 있다. 레드는 남자 셋, 블루는 여자 셋. 그 다른 요소가 가치관 코드였을 것이다. 결과는 성별도 가치관도 아니고 발행권이었다. 설정은 세 축을 줬는데 판은 한 축으로 끝났다.

(덧) 마지막 회에 참가자들의 코드가 공개됐다. 여섯 낱말을 들고 열 편을 거꾸로 짚어 봤는데, 돈이 오간 자리들과 잘 겹치지 않았다. 겹치게 만들 수 있었던 자리에서 그렇게 만들지 않은 것이 이 시즌의 선택이다. 셋째 길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길 위에 놓고 간 것이 서른일곱 문항이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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