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7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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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보는 손, 글을 읽는 손

정담뜰· 2026. 11. 04.· 2,407자

환유는 나무를 본다. 수목원 연구실에서 일하고, 유학을 준비한다. 정인은 글을 본다. 국문과 대학원생이다. 둘의 일은 역에서 만난다.

「편지」는 1997년 11월 22일에 개봉했다. 이정국이 연출하고 각본은 조환유·이정국·김무령이 썼다. 102분. 최진실이 정인을, 박신양이 환유를 맡았다. 역은 춘천의 경강역이고 수목원 장면은 경기도 가평의 수목원에서 찍었다. 2004년에 태국에서 같은 제목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정인이 기차를 타려고 역으로 뛴다. 건너편에서 오던 남자와 부딪힌다. 기차에는 올랐다. 지갑은 바닥에 남았다. 남자가 지갑을 줍는다. 택시를 잡는다. 기차를 쫓는다. 지갑이 주인에게 돌아간다. 지갑에는 돈과 기차표가 있었다. 남자는 자기 돈으로 택시를 탔다. 남의 돈을 돌려주려고 자기 돈을 쓴 것이 둘의 첫 거래다.

남자의 일터는 수목원이다. 나무와 꽃의 이름을 아는 것이 그의 일이다. 새벽에 전화를 건다. 금강초롱을 보여 주겠다고 한다. 정인이 수목원에 온다. 환유가 동전을 꺼낸다. 앞면이면 정인과 결혼하고 뒷면이면 예정대로 유학을 간다. 정인이 대답하기 전에 던진다. 앞면이다. 동전 하나가 유학을 지웠다. 유학은 그가 준비하던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동전에 걸었다.

공개된 시나리오에는 정인의 일터가 더 적혀 있다. 국문과 사무실에서 일하고 도서관에서 논문을 쓴다. 환유의 연구실 회의에 도시락을 들고 나타나는 장면도 있다. 창밖에서 직원들이 웃는다. 밥을 들고 남의 일터에 간 것이다. 영화에 그대로 들어갔는지는 시나리오만으로 알 수 없다. 적힌 것만 적는다.

둘은 수목원 잔디밭에서 결혼한다. 수목원 안 낡은 관사에 산다. 관사는 직장이 주는 집이다. 집세 대신 일이 들어간다. 아침에 환유는 나무에게 가고 정인은 학교에 간다. 저녁에 정인이 돌아온다. 발이 지쳐 있다. 환유가 정인의 발을 씻긴다. 손으로 하는 일이다. 발은 걸은 만큼 더러워지고, 씻기는 손은 하루치 걸음을 닦는다. 이 장면을 두고 그해 남편의 얼굴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편지 포스터

환유가 하루 종일 몸살을 앓는다. 쓰러진다. 구급차가 온다. 악성 뇌종양이다. 의사는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환유는 수술을 받는다. 정인을 위해서다. 몸이 하는 마지막 큰 일이 수술대에 눕는 것이다.

정인에게는 강의할 기회가 생겼다. 대학원생이 강단에 서는 일이다. 병실에서 환유가 말한다. 자기 때문에 그 기회를 버리지 말라고. 자기 일은 끝났고 아내의 일은 남았다. 그는 남은 쪽을 지킨다.

남은 날에 환유는 편지를 쓴다. 병실에서 쓴다. 손이 하는 일이 나무에서 종이로 옮겨 갔다. 한 통이 아니다. 여러 통이다. 자기가 떠난 뒤에 아내가 읽을 글이다. 쓰는 사람은 읽히는 날에 없다. 그래도 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직업이다. 어느 저녁 정인이 시집을 읽어 준다. 환유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1997년의 기차는 택시가 국도로 따라잡을 만큼 느렸다. 1997년의 편지는 종이였고, 영상은 테이프였다. 그래서 이 영화의 일들은 전부 손에 잡힌다. 지갑, 동전, 발 씻는 물, 편지지, 비디오테이프. 휴대전화가 있었으면 지갑은 역에서 돌아오고 편지는 예약 발송이 되었을 것이다. 손이 할 일이 없어졌을 것이다.

정인은 관사에 남는다. 죽은 사람처럼 산다. 옆집 아저씨가 본다. 정인의 후배들을 부른다. 후배들이 차로 정인을 서울로 데려가려 한다. 차가 떠나려는 순간 편지가 온다. 환유의 편지다. 「정인아, 나야」로 시작한다. 정인은 차에서 내린다. 관사에 남는다. 날마다 편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이 일이 된다. 그리고 자기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안다. 몸이 먼저 안다.

마지막에 비디오테이프가 있다. 환유가 카메라 앞에 앉아 있다. 병든 얼굴이다. 정인에게 말한다. 시나리오에 적힌 그 말은 이렇다. 「정인아, 우리 마음 속에 우리의 기억이 남아있는 동안까지는 이별하지 않는거라 생각하자.」 정인이 화면을 끌어안고 운다. 화면은 유리다. 안기지 않는다. 그다음 아이가 나온다. 찍는 자리에서 스태프도 울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환유의 일을 센다. 나무를 보는 일, 유학을 준비하는 일, 택시를 타는 일, 동전을 던지는 일, 발을 씻기는 일, 수술을 받는 일, 편지를 쓰는 일, 카메라 앞에 앉는 일. 뒤로 갈수록 몸이 줄고 손만 남는다. 마지막에는 손도 없고 목소리만 남는다. 그 목소리가 정인을 서울행 차에서 내리게 했다. 관사에 남게 했다. 환유가 지키라고 한 강의가 남았고 아이가 남았다.

돈은 세 번 나온다. 역에서 떨어진 지갑, 기차를 쫓은 택시비, 결혼을 정한 동전. 셋 다 환유 손에 있었다. 셋 다 그가 정인에게 썼다. 이 영화는 돈을 세 번 쓰고 치운다. 남는 것은 손이 한 일뿐이다.

정인의 일은 읽는 일이다. 시집을 읽어 준다. 편지를 읽는다. 환유가 쓰고 정인이 읽는다. 둘의 일은 끝까지 짝이 맞는다.

죽은 사람이 쓴 편지를 누가 날짜에 맞춰 부쳤는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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