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7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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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한 통이 아니었다
1997년 멜로를 처음 보시려는 분들께 먼저 수순을 읊어 드리겠다. 소품 분실형 첫 만남, 추격, 기습 프로포즈, 짧고 밝은 신혼, 불치병 선고, 유품으로 남긴 글, 죽은 뒤 도착하는 메시지, 새 생명. 여덟 개다. 「편지」는 이 여덟을 차례로 밟는다. 다만 밟는 순서가 아니라 밟는 발에 조금 특이한 데가 있어서, 그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영화는 1997년 11월 22일에 개봉했다. 이정국 감독, 각본은 조환유·이정국·김무령, 권형술의 소설이 원작이고 102분이다. 최진실이 국문과 대학원생 정인을, 박신양이 수목원 연구실에서 일하며 유학을 준비하는 환유를 맡았다. 최용민·이준섭·송광수가 곁에 선다. 역 장면은 춘천 경강역에서, 수목원 장면은 가평의 수목원에서 찍었다.
첫 수순부터 보자. 정인 씨가 기차 시간에 쫓겨 역으로 뛰고, 건너편에서 오던 남자와 부딪히고, 무언가를 떨어뜨린다. 남자는 그걸 주워 택시를 잡아 기차를 쫓는다. 여기까지는 교과서다. 교과서에서 벗어나는 건 떨어뜨린 물건이 무엇이었는지가 자료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작품 소개는 지갑이라 하고, 어느 기록은 기차표라 한다. 둘 다일 수도 있겠다. 나는 민간인이라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지갑이든 표든, 기차를 택시로 쫓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멜로의 남자는 첫 장면에서 뛰어야 한다. 뛰는 모습이 곧 신용이 되는 것이다.
둘째와 셋째 수순이 한 장면에 들어 있다. 수목원에서 다시 만난 환유 씨가 동전을 꺼낸다. 앞면이 나오면 정인 씨와 결혼하고 뒷면이 나오면 예정대로 유학을 간다고 한다. 정인 씨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던진다. 앞면이다. 수순대로라면 프로포즈는 여자가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자리인데, 이 영화는 그 자리를 동전에 맡겼다. 정인 씨 입장에서는 결혼 승낙을 본인이 아니라 어느 나라 돈인지도 모를 쇠붙이가 한 셈이 되겠다. 이 대목에 대해 영화는 일언반구 해명이 없다. 정인 씨도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통한다. 1997년 멜로가 구수한 건 이런 데다. 따지면 안 되는 자리에서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신혼은 짧고 밝아야 한다. 밝다. 환유 씨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 금강초롱을 보여 주겠다고 정인 씨를 부른다. 피곤해서 돌아온 아내의 발을 조심스레 씻겨 준다. 경강역을 소개한 여행 기사에 따르면 환유 씨는 정인 씨 눈에 띄려고 역에 예쁜 화분을 갖다 놓기도 했다고 한다. 꽃 이름을 아는 남자가 꽃으로 구애하는 것이니 직업 활용이 되겠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영어 제목의 노래 두 곡이 흐른다. 1997년 멜로에서 영어 노래가 안 흐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섯째. 하루 종일 몸살을 앓던 환유 씨가 쓰러지고 구급차가 오고 악성 뇌종양이라는 말이 나온다. 수순 그대로다. 수순대로 환유 씨는 남은 날에 편지를 쓰고, 어느 저녁 정인 씨가 시집을 읽어 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여기까지가 다섯째와 여섯째다. 보시는 분들은 이쯤에서 남은 상영시간을 한 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아직 남아 있다. 그 남은 시간이 이 영화의 본론이다.
일곱째 수순, 죽은 뒤 도착하는 메시지. 보통은 한 통이다. 유서든 녹음이든 한 번 도착해서 산 사람을 울리고, 산 사람은 그걸 품고 떠난다. 이 영화는 다르게 간다. 정인 씨가 죽은 사람처럼 지내고, 주변 사람들이 그를 차에 태워 데려가려 한다. 차가 떠나려는 순간 편지가 온다. 환유 씨의 편지다. 정인 씨는 떠나지 않는다. 집에 남아 날마다 편지를 기다린다. 편지가 계속 온다는 뜻이다. 제목은 「편지」인데 영화 속 편지는 한 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순대로라면 떠나야 할 사람을 눌러앉히는 데 쓰인 게 유품 한 점이 아니라 우편 배달이라는 제도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매일 올 수 있게 만든 장치. 이 배달의 뒷사정을 영화는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나도 그 앞에서는 묻기를 그만두었다. 아무튼.
그러고도 영화는 한 번 더 간다. 비디오테이프다. 환유 씨가 카메라 앞에 앉아 정인 씨에게 말한다. 정인 씨는 화면 속 남편을 쓸어안고 운다. 당시 어느 학보 리뷰는 이 장면에서 온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적었다. 편지라는 수순을 다 쓰고 나서 비디오라는 수순을 하나 더 얹은 것이다. 과연. 여덟째 수순인 새 생명도 빠지지 않는다. 정인 씨는 자기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영화 끝에 그 아이가 나온다.
그러니 정리하면 이렇다. 수순 여덟을 다 따랐고, 그중 일곱째에서만 한 번을 여러 번으로 바꿨다. 그 바꾼 자리 하나 때문에 영화 후반이 기다림의 이야기가 된다. 떠난 사람을 그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올 편지를 기다리는 이야기. 1997년 리뷰가 구성이 단조롭고 통속적이라고 지적한 것도 맞고, 그 단조로움이 있어서 후반이 서는 것도 맞다. 앞에서 다 뻔하게 가 줬으니 뒤에서 한 통 더 와도 관객이 받아 준다.
볼까 말까 물으시는 분들께는 이렇게 말씀드리겠다. 수순을 다 아셔도 상관없다. 이 영화는 수순을 숨겨서 울리는 영화가 아니라 수순대로 와 줘서 울리는 영화다.
추신. 떨어뜨린 것이 지갑인지 기차표인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확인하신 분은 알려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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