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7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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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이라는 말은 빼고 보세요
요즘 우리 집 우편함에 종이로 오는 건 고지서하고 카드 명세서뿐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손으로 쓴 편지를 날마다 기다리는 사람을 화면으로 보는 게 좀 낯설었어요. 영화 얘기는 거기서부터 하려고요. 그 전에 빈말 두 개부터 치우고요.
1997년 11월에 개봉한 영화예요. 이정국 감독이 찍었고, 권형술이라는 분의 소설이 원작이고, 102분이에요. 국문과 대학원생 정인을 최진실이, 수목원 연구실에서 일하는 환유를 박신양이 했어요. 그 정도만 알면 돼요.
첫 번째 빈말은 작품 소개에 있어요. 「자신의 사랑을 최고의 걸작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환유」. 이 문장을 읽고 영화를 틀면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게 되잖아요. 근데 화면에 있는 건 동전이에요. 소개 글에도 써 있어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설 때면 늘 동전을 던져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수목원에서 정인을 다시 만난 환유가 동전을 꺼내요. 앞면이면 결혼, 뒷면이면 예정대로 유학. 정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던져요. 앞면. 그걸로 끝이에요.
글쎄, 걸작을 만들고 싶다는 사람이 제일 큰 결정을 동전한테 맡겼다는 게 저는 이상하더라고요. 걸작은 공들여서 만드는 거잖아요. 동전은 공을 안 들이려고 던지는 거고. 그러니까 이 남자는 걸작을 만들 생각이 없었어요. 고르기가 싫었던 거예요. 유학 가는 것도 좋고 이 사람하고 사는 것도 좋은데,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걸 자기 손으로는 못 하겠으니까 쇠붙이한테 미룬 거지. 저는 그게 더 사람 같았어요. 걸작보다는. 동전은 돈이잖아요. 얼마짜리인지는 안 나와요. 근데 그 한 닢으로 유학 하나가 날아갔으니, 제가 본 중에 제일 비싸게 쓰인 동전이에요.
그 뒤에 화면에 있는 것도 걸작이 아니에요. 새벽에 전화해서 꽃 보여 준다고 부르는 거, 피곤해서 들어온 아내 발 씻겨 주는 거. 그런 건 작품이 아니라 잔일이잖아요. 당시 어느 대학신문 관람평이 이 두 장면에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썼던데, 아름다움이라는 말도 저는 좀 크다 싶고요. 새벽에 깨우는 거, 발 씻는 거, 그냥 같이 사는 사람이 하는 일이에요. 그걸 걸작이라고 포장하니까 영화가 실제보다 거창해 보이는 거예요. 포장을 뜯으면 수목원 관사에서 돈 없이 사는 젊은 부부가 있어요. 대학원생하고 연구원이에요. 1997년이고요. 걸작은 없어요.
두 번째 빈말도 소개 글에 있어요. 환유가 죽고 나서, 「환유가 죽기 전에 써놓았던 한 통의 편지를 받아 든 정인은 다시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된다」. 활기. 이 말이 저는 제일 안 맞더라고요.
화면을 보면 이래요. 환유가 쓰러지고, 뇌종양 말기고, 희망 없는 수술을 받고, 죽어요. 정인은 관사에서 죽은 사람처럼 지내요. 옆집 아저씨가 보다 못해 정인 후배들을 불러요. 서울로 데려가라고. 차에 태워서 떠나려는 순간에 편지가 와요. 환유가 쓴 거예요. 정인은 차에서 내려요. 그리고 집에 남아서 매일 편지를 기다려요.
이게 활기예요? 저는 아니라고 봐요. 서울 가서 사람들 틈에 섞이는 게 활기지, 혼자 관사에 남아서 우편함 보는 건 활기가 아니잖아요. 그건 기다리는 거예요. 죽은 사람이 보내는 편지를 날마다 기다리는 거. 소개 글은 그걸 되살아났다고 쓰는데, 화면에 있는 건 떠나려던 사람을 주저앉힌 편지 한 통이에요. 좋게 말하면 붙든 거고, 나쁘게 말하면 못 떠나게 한 거고. 저는 둘 다 맞다고 봐요. 그래서 이 영화가 슬픈 거예요. 활기라서가 아니라.
그다음에 비디오가 있어요. 환유가 죽기 전에 카메라 앞에 앉아서 찍어 둔 거. 정인이 화면 속 남편을 끌어안고 울어요. 그 대학신문 관람평이 이 장면에서 극장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적어 놨는데, 그건 믿어요. 저도 그 장면은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더라고요. 근데 그 글이 그다음에 쓴 말, 마지막에 나오는 아이를 통해서 「그들의 사랑이 영원할 거란 걸 보여준다」, 이건 또 빈말이에요. 영원이 어디 있어요. 화면에 있는 건 테이프예요. 테이프는 돌리면 늘어나고, 편지는 쓴 만큼만 와요. 환유가 몇 통을 썼는지는 저도 몰라요. 근데 분명한 건 언젠가는 마지막 통이 온다는 거예요. 영화는 거기까지 안 보여 줘요. 아이를 보여 주고 끝내요. 끝나는 자리를 잘 골랐다고 생각해요. 더 가면 편지가 끊기는 날을 찍어야 하니까.
그래서 남는 평범한 진실이 뭐냐면 이거예요. 걸작도 없고 영원도 없고, 동전 하나 던진 남자하고 편지 기다리는 여자가 있다. 그게 전부예요. 당시 평에 구성이 단조롭고 통속적이라고 적혀 있던데, 맞는 말이에요. 단조로운 게 이 영화의 전부고, 그 전부를 큰 말로 덮으니까 오히려 작아 보이는 거예요.
볼까 말까 하시면, 소개 글은 읽지 말고 보세요. 걸작이니 활기니 영원이니 하는 말은 빼고요. 그 말들 빼고 남는 게 이 영화의 전부인데, 전부면 충분한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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