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웨일폴: 고래에 먹힌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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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이 끼어들 때마다 공기가 샌다
나는 회상이 싫다. 정확히 말하면 위기의 한가운데에 끼어드는 회상이 싫다. 주인공은 숨을 못 쉬는데 화면은 느긋하게 십 년 전으로 간다. 그 사이에도 공기는 샌다. 생존 영화가 이런 식으로 숨을 고르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뒤로 뺀다.
싫은 것의 목록을 먼저 적어 둔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적었어도 거의 같은 목록이 나왔을 것이다.
- 위기마다 끼어드는 회상
- 공기통 잔량을 세는 시계
- 어릴 때 배운 기술이 꼭 그 자리에서 쓸모를 찾는 일
-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
- 때맞춰 나타나는 구조 보트
- 제목이 줄거리를 다 말해 주는 것
「웨일폴: 고래에 먹힌 남자」는 이 여섯 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건드린다. 솔직히 말하자. 그런데도 나는 끝까지 봤고, 몇 군데서는 몸을 앞으로 당겼다. 어디서 피했고 어디서 저질렀는지를 적는 게 이 글이다.
기본 정보. 브라이언 더필드가 연출했고 2023년에 나온 같은 제목의 소설을 원작자 대니얼 크라우스와 함께 각본으로 옮겼다. 106분. 한국에서는 2026년 10월 14일에 개봉했다. 오스틴 에이브람스가 아들 제이, 조시 브롤린이 아버지 밋, 엘리자베스 슈가 어머니 자라다. 다이빙 보트 선장이던 밋은 말기 중피종을 앓다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고 스스로 바다로 들어간다. 1년 뒤 대학에서 돌아온 제이가 허가 없이 혼자 잠수해 아버지의 유해를 찾다가, 대왕오징어와 싸우던 향유고래에게 오징어와 함께 삼켜진다. 공기통에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제목부터 따진다. 「고래에 먹힌 남자」.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안다. 남자가 고래에 먹힌다. 그리고 이런 영화의 남자는 거의 살아 나온다. 영화도 그걸 아는 눈치다. 첫 장면에서 아버지를 먼저 보내 놓고, 남은 긴장을 「살아 나오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데리고 나오느냐」로 옮긴다. 제목이 줄거리를 다 말해 주는 건 맞는데, 영화는 그 줄거리에 별로 기대지 않는다. 피한 것 하나.
고래 안도 피한 쪽이다. 나는 이런 영화의 괴물 내부가 대체로 동굴 세트에 점액을 바른 것이라고 여긴다. 이 영화는 다르다. 제이가 눈을 뜨는 첫째 위는 먹이를 으깨는 근육의 방이고, 빛은 발광 박테리아에서 온다. 둘째 위에 들어가면 산이 맨손을 녹인다. 함께 삼켜진 오징어의 부리에 베이고, 요동치는 위벽에 갈비뼈가 나가고, 고래가 깊이 내려가면 고막이 터진다. 360도로 도는 세트와 수중 촬영, 실물 고래 모형을 섞어 찍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점액이 화면 밖으로 묻어 나올 것 같다. 색은 내내 푸른 회색이다. 후반에 심해로 내려가면 화면이 흑백이 되고, 그때부터 심해가 바다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색이 맞았다고 본다.
이제 저지른 것. 회상이다. 제이가 잔압계를 보고 절망하는 바로 그 순간, 화면은 어린 제이와 아버지가 있는 배 위로 간다. 아버지는 남자다움을 가르치고 아들을 몰아붙인다. 다시 뱃속. 다시 절망. 다시 배 위. 이게 영화의 박자다. 한 평은 이 회상이 인물의 상처를 설명하는 데만 머물러 현재의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썼고, 다른 평은 반대로 회상이 너무 편리하게 매번 문제를 풀어 준다고 썼다. 서로 모순처럼 들리는데 나는 둘 다 맞다고 본다. 상처를 설명하는 회상과 해법을 꺼내 주는 회상이 번갈아 나오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공기는 샌다. 뱃속의 한 시간을 따라가는 영화가 자기 손으로 그 시계를 몇 번이나 멈추는 셈이다. 나는 회상이 올 때마다 공기통 바늘을 떠올렸고, 영화가 바란 건 아마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어릴 때 배운 기술도 저질렀다. 9볼트 배터리와 강철 수세미. 한 평이 「체호프의 9볼트 배터리」라고 불렀는데 정확한 말이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불 붙이는 법이 뱃속의 메탄과 공기통의 산소를 만나 폭발이 되고, 오징어 부리로 그걸 터뜨려 고래의 몸을 뚫고 나온다.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웃었다. 편리해서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정직하게 깔아 둔 복선을 이렇게까지 정직하게 회수하는 영화가 요즘 드물어서다. 비웃음과 감탄이 반씩이다.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 이것도 저질렀다. 제이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건 산소가 모자라 정신이 흐려진 뒤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후반 30분은 그 목소리와 죽어 가는 고래를 점점 겹쳐 놓는 쪽으로 가고, 여러 평이 이 대목을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적었다. 나도 그쪽이다. 뱃속의 한 시간 동안 영화가 쌓은 건 점액과 산과 부러진 뼈였다. 그걸 마지막에 아버지의 뜻으로 감싸는 순간 쌓은 것이 조금 가벼워진다. 잘 만든 영화가 마지막에 자기 성과를 깎는 걸 보는 건 늘 아깝다.
구조 보트는 반쯤 피했다. 제이가 식도를 거슬러 올라 고래 입까지 갔을 때 수면에 관광 보트가 있다. 못 본다. 고래가 다시 잠수하고 제이는 안으로 굴러떨어진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몸을 앞으로 당겼다. 영화가 이 장르의 가장 게으른 장면, 「때맞춰 나타나는 배」를 한 번 보여 주고 거둬 갔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에 배는 다시 온다. 그렇지 않으면 「고래에 먹힌 남자」가 아니라 「고래에 먹힌 남자의 유해」가 되었을 테니까. 한 번 거절당한 배가 두 번째에 오는 건 그래도 참을 만하다.
정리하면 여섯 개 중 둘을 피했고, 하나는 반쯤 피했고, 셋은 저질렀다. 이 성적표로 영화를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루했다. 회상이 몇 번째로 끼어들 때부터였는지 세다가 그만뒀다. 그런데 뱃속 장면은 좋았다. 모순이 아니다. 이 영화는 자기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거의 정확히 반으로 갈라 놓았다. 잘하는 쪽은 고래 안이고, 못하는 쪽은 고래 밖이다. 비어 있는 관을 두고 치르는 장례, 배 위의 훈계, 집을 나와 대학으로 간 아들. 전부 밖이다.
볼까 말까. 좁은 데 갇힌 사람이 손으로 벽을 더듬는 걸 한 시간 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면 보라. 회상이 나올 때마다 자리를 비워도 줄거리는 따라갈 수 있다. 그건 칭찬이 아니다.
추신. 밋이 어떻게 바다로 들어갔는지는 적지 않았다. 그건 이 영화의 어느 장면보다 무거운 일이고, 리뷰가 다룰 자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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