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여전히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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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막에서 노래한 죄

삐딱하게보기· 2026. 11. 04.· 2,840자

혐의부터 읊겠다. 일제강점기 산골에서 끌려갈 위기에 놓인 열일곱 소녀들이 노래하고 춤춘다. 한 번이 아니다. 산등성이에서, 숨어 있는 화장막 안에서, 그리고 크레딧이 오르는 달빛 아래에서. 이 영화를 두고 나온 유보적인 말은 거의 전부 여기를 가리킨다. 한국 영화에 흔치 않은 연출이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고, 노래가 서사의 흐름을 종종 끊는다는 것이다. 관객 후기에도 이야기가 한 줄기로 흐르지 않고 산만하다는 말이 보인다. 나는 오늘 그 노래들의 편에 서겠다.

혐의

기본 사실. 송일곤이 연출했고 이혜숙의 희곡이 바탕이며 각본의 대부분을 작가가 썼다. 118분, 12세 이상 관람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상영된 뒤 2026년 10월 21일에 개봉했다. 김혜자가 노년의 순옥, 차미경이 노년의 정임, 박서경과 최주은이 1942년의 순옥과 정임, 문성현이 소년 두영, 조성하가 곽씨, 이세영이 손녀 지안이다. 영화는 세 시간대를 오간다. 소녀들이 서울에서 가수와 단장이 되자고 약속하는 1942년, 노년의 둘이 서울 노래자랑에 나가려는 1991년, 그리고 여든다섯의 순옥이 있는 2010년. 세 번째 시간대가 두 번째를 어떻게 뒤집는지는 뒤에서 말한다.

혐의의 내용은 이렇다. 마을에는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며 소녀들을 데려간다는 소문이 돈다. 그 소문 아래에서 소녀들은 산과 들을 누비며 노래한다. 뮤지컬 연출자 박칼린과 안무가 신선호가 꾸린 번듯한 뮤지컬 장면이 극 중간에 들어오고, 정임과 순옥과 두영 셋이 「서울에 가면」을 함께 부른다. 역사의 무게를 아는 관객은 여기서 멈칫한다. 이 시대에 이 노래가 가당한가. 동화 같다는 말이 칭찬인지 흉인지 애매하게 오간다. 흐름이 끊긴다는 말은 아마 그 멈칫함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여전히 찬란하게 스틸컷

변론

첫 번째 장면. 영화는 산등성이에서 시작한다. 정임이 당대의 유행가 「이태리의 정원」을 부르고 순옥이 옆에서 박수를 친다. 해발 천이백 미터의 활공장에서 옛 렌즈와 자연광으로 찍었다고 한다. 그다음 영화가 보여 주는 것은 1991년, 노년의 순옥이 카세트테이프로 같은 노래를 다시 듣는 장면이다. 두 시간대를 잇는 것은 설명 자막도 회상의 손짓도 아니고 노래 한 곡이다. 이 영화에서 노래는 장식이 아니라 접착제다. 노래를 빼면 1942년과 1991년은 다른 영화 둘이 된다. 흐름을 끊는다고 지목된 것이 실은 흐름을 만드는 장치라는 말이다.

두 번째 장면. 소녀들은 두영의 도움으로 마을 화장막에 숨는다. 숨어서 한글을 배우고, 그 안에서 꿈을 노래한다. 제작진은 화장막 세트를 국내 자료가 모자라 일본 자료와 논문을 뒤져 처음부터 지었고, 다락과 소각로뿐 아니라 환상 장면의 동선까지 셈해 설계했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만든 사람들의 손을 상상한다. 상상이다. 소각로가 있는 방의 치수를 재면서 동시에 그 방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돌며 노래할지를 그리는 손. 죽음을 처리하는 장소에 꿈을 노래하는 장면을 겹쳐 놓기로 한 결정은 겁 없는 결정이다. 나라면 못 했다. 그 방에서는 울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왜 울리지 않고 노래하게 했는가. 감독은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중심에 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관객이 조금 다르게 경험하기를 바랐다고 했다. 숲은 빛이 들면 아름답고 어둠이 깔리면 비밀스러워 두 세계가 함께 있다고도 했다. 노래는 그 두 세계 중 빛 쪽이다. 영화는 비극의 순간보다 그 전의 시간에 오래 머문다. 끌려간 뒤의 일은 관객이 이미 아는 것으로 두고, 화면은 그 전의 날들에 준다. 그러니 노래가 많다는 것은 영화가 어느 쪽을 지키기로 했는지의 표시다. 모름지기 변론이란 피고가 한 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다. 흐름을 끊는 노래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노래라고 나는 부르겠다.

세 번째, 뒤집히는 자리. 1991년은 진짜가 아니다. 정임은 일본군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고, 노래자랑을 준비하는 두 노인의 가을은 2010년에 여든다섯이 된 순옥이 병 속에서 그려 낸 시간이다. 정임이 「나 누구야?」라고 묻는 장면은 그래서 거꾸로 읽힌다. 잊어 가는 사람은 정임이 아니라 순옥이다. 여기서 뮤지컬 장면들이 다시 보인다. 1942년의 노래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는 장면이라면, 1991년 전체는 한 노인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긴 노래 한 곡이다. 앞부분의 노래들은 그 큰 노래를 받아들일 귀를 미리 만들어 둔 것이다. 이것은 내 풀이다. 다만 노래 없는 버전의 이 영화를 상상해 보면, 1991년이 환상이라는 뒤집기는 속임수로 보였을 것이다. 노래가 있어서 그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같은 어법의 연장이 된다.

엔딩 크레딧에는 정임이 달빛 아래 노래하는 장면이 붙는다. 소녀 정임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를 모두가 잠든 밤 지리산 시냇가에서 그대로 녹음해 썼다고 한다. 감독은 관객이 정임이라는 인물을 기억하기를 바랐다고 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에게 영화가 마지막으로 준 것은 대사도 사진도 아니고 노래 한 곡이다. 이 영화가 노래로 비판받는다면 노래로 변호되어야 마땅하다.

여전히 찬란하게 포스터

판결은 당신에게

인정할 한계 하나. 노래가 끝나고 노년의 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영화는 온도를 다시 올려야 하고, 그 비용은 관객이 낸다. 흐름이 끊긴다는 지적은 그 비용을 정확히 가리킨다. 나는 그 비용이 아깝지 않았다고 말할 뿐이고, 아까운 사람의 계산도 틀린 계산은 아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영화의 노래 장면에서 질투를 느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나. 가장 무거운 소재 앞에서 가장 가벼운 형식을 고르고, 그 가벼움으로 무게를 들어 올리는 일. 영화는 비극을 그리는 대신 비극 전의 빛을 그렸고, 그 빛은 노래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열일곱의 노래를 유치하다고 할 수는 있다. 열일곱이 유치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무거운 것을 들려면 먼저 가벼워져야 한다. 이 영화는 그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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