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왕과 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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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누구와 먹는 것인가

고요한땀· 2026. 10. 10.· 3,038자

혼자 사는 사람의 밥상에는 수저가 한 벌 놓인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 두 벌을 놓는다. 손님이 와서가 아니라 어제 쓴 젓가락을 치우지 않아서다. 차린다기보다 상 위에 물건을 올려 두는 쪽에 가깝다. 그렇게 차린 상 앞에 앉으면 밥을 먹는 일과 끼니를 때우는 일이 서로 다른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내게 밥상을 하나 내민다. 1457년 영월의 산골이다. 왕위에서 밀려난 소년이 가마에 실려 오고, 마을의 촌장이 그를 맡는다. 유배지를 유치하면 마을에 재물이 돈다기에 제 발로 나섰던 남자다. 그러니 이것은 귀한 손님을 모셔 오려던 사람이 식구를 얻는 영화다.

고비는 서넛이다. 가마가 들어오고, 내린 사람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마을은 겁을 먹는다. 소년은 끼니를 거른다. 권력은 사람을 보내 본보기를 만든다. 끝에 가서 소년은 제 손으로 끝을 청한다. 촌장은 그 청을 듣는다.

영화의 한가운데에는 겸상이 있다. 마루에 놓인 상은 낮다. 다리가 짧아서 두 사람 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야 밥알이 보인다. 한쪽에는 흰 옷을 입은 소년이 앉고 맞은편에는 무명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앉는다. 수저는 두 벌이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상의 높이다. 상이 낮으니 둘 다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의 머리는 같은 높이에 온다.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함께 먹는다는 것은 같은 높이에 앉는다는 뜻이다. 같은 높이에 앉는다는 것은 상대의 손이 어디로 가는지 보게 된다는 뜻이다. 손을 본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집고 무엇을 남기는지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만큼 알고 나면 그는 더 이상 맡아 둔 사람이 아니다. 신분이 다른 둘이 좀처럼 겸상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겸상은 호의가 아니라 사고다. 한번 같이 먹으면 되돌리기 어려운 종류의. 신분이란 결국 누구와 같은 상에 앉지 않는가의 목록이었을 것이다. 그 목록에서 한 칸이 지워지는 데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밥 한 끼였다.

그러나 이 밥상은 기록에 없다. 유배 온 왕과 그 고을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는 설정을 역사학자들은 의심한다. 실제의 그는 촌장도 아니었다. 영월의 호장, 그러니까 수령이 상주하지 않는 고을의 행정을 맡던 아전의 우두머리였다. 영화는 그 직함을 지우고 그 자리에 촌장을 올려 두었다. 지운 자리에 밥상을 놓은 셈이다.

관청의 말로 하면 그는 보수주인이다. 유배 온 사람을 맡아 거두는 집주인. 사람 하나를 맡기고 맡는 일에도 이렇게 단정한 이름이 붙는다. 단정한 이름은 책임의 범위를 정해 준다. 먹일 것, 재울 것, 달아나지 않게 할 것. 그 목록에 같이 먹을 것은 없다. 공문서는 사람을 맡기면서 마음까지 맡기지는 않는다. 그것이 공문서의 미덕이고 또한 공문서의 전부다. 영화가 한 일은 그 목록에 한 줄을 몰래 보태는 일이다.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밥상을 나르는 사람은 따로 있다. 걸음마를 뗄 때부터 소년을 돌봤다는 궁녀가 유배길까지 따라와 있다. 소년이 식음을 전폐하는 동안 그 곁을 지키는 사람도 그 여자다. 그런데 겸상하는 장면에서 그는 앉지 않는다. 상 뒤에 서 있다. 두 남자가 같은 높이가 되는 동안 한 사람은 계속 서 있다. 영화는 이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을 실수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평생 남의 뒤에 서 있도록 배운 사람에게 앉으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마 이 영화가 감당하려던 것보다 큰 장면이었을 것이다. 다만 서 있는 사람은 끝까지 서 있다. 화면 안에서 그 소년을 가장 오래 지킨 사람이 가장 적게 앉는다. 신분을 넘는 이야기에도 넘지 않고 남겨 두는 선이 있다.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끝은 알려진 대로다. 영화에서 소년은 촌장에게 자기를 도와 달라고 청한다. 죽는 일을 도와 달라는 청이다. 촌장은 괴로워하면서 그 마지막을 함께한다. 이것은 기록에 없는 장면이고 만든 사람들이 지어낸 장면이다. 기록 속의 그가 한 일은 다른 것이었다.

고을 아전으로 이름이 엄흥도라는 자가 곡하며 관을 갖추어 장사 지냈다.

소년이 죽고 예순 해쯤 지난 1516년, 중종실록에 이 한 줄이 적혔다. 이 문장에는 밥상이 없다. 우정도 없다. 곡했다는 동사와 장사 지냈다는 동사가 있을 뿐이다. 영화는 그 두 동사 사이의 빈칸에 몇 해의 생활을 적어 넣었다. 지어낸 것이 맞다. 그런데 지어낸 쪽이 기록보다 덜 사실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곡하려면 먼저 알아야 하고, 알려면 먼저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록 속에는 두 사람이 따로 있다. 왕의 목에 줄을 걸었다는 사람과, 그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낸 사람. 영화를 만든 이들은 그 둘이 혹시 같은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 질문 하나로 영화의 모양이 정해졌다. 죽인 손과 묻은 손이 같은 손이라면 그 손의 주인은 남은 평생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겠는가. 지어낸 이야기치고는 제법 잔인한 지어냄이다.

마을 쪽 뒷이야기도 기록과 야사에 조금 남아 있다. 시신을 거둔 뒤 그는 영월을 떠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후손들을 여러 고을로 흩어 놓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관에 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년의 무덤을 왕릉이라고 불렀다. 아무도 그렇게 부르라고 시키지 않았는데 그렇게 불렀다.

조선의 유배가 늘 방 안에 가두는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보통의 유배인은 마을을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니 밥상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이 터무니없는 그림만은 아니다. 제도가 허락한 것은 거리의 가까움이었고, 영화가 덧붙인 것은 그 가까움을 쓰는 방식이다. 가까이 사는 사람을 끝까지 모르는 채로 두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사람을 직함으로 먼저 부른다. 호장이라고 부르면 할 일이 정해지고 촌장이라고 부르면 관계가 정해진다.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부르는 사람의 목적에 달려 있다. 관청은 직함을 적고 영화는 사이를 적는다. 1876년에 그는 시호를 하나 받았다. 충의공. 이번에도 나라는 그를 직함으로 불렀다.

오늘 저녁에도 혼자 밥을 먹었다. 수저는 한 벌만 놓았다. 상이 낮아야 허리를 숙이고, 허리를 숙여야 맞은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마주 앉은 사람이 없으면 상의 높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도 상을 조금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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