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경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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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에 사람을 싣고 관광하는 법
고백하건대 나는 트렁크에 사람이 실린 채 출발하는 영화를 몹시 좋아한다. 짐칸에 무엇이 들었는지 관객만 알고 길가의 행인은 모르는 상태, 그 불공평한 앎이 두 시간을 끌고 가기 때문이다. 거기에 식구 전원에게 단체 티셔츠까지 맞춰 입혔다면 나는 이미 반쯤 넘어간 셈이다. 제목부터가 능청이다. 도시 경주와 막내 경주, 여행이라는 뜻의 기행과 기이한 짓이라는 뜻의 기행을 한 단어에 겹쳐 놓았으니, 이 영화는 간판에서부터 두 겹 장사를 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경주기행」은 첫 장면부터 관객과 계약서를 쓴다. 엄마 옥실과 세 딸 장주, 영주, 동주가 하트 아래 패밀리라고 찍힌 흰 티셔츠를 입고 청테이프로 땜질한 낡은 노란 봉고차에 오른다. 여덟 해 전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 경주의 생일이고, 목적지는 경주다. 트렁크에는 열다섯 해 형을 받고 여덟 해 만에 나온 그 남자가 검은 비닐에 싸여 실려 있다. 옥실이 탄원서까지 써서 서둘러 내보낸 사람이다. 유가족 모임에서 알게 된 집 아들들이 잡아다 넘겨주었다. 계약 조항은 단순하다.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네 여자가 사람 하나를 끝까지 죽일 수 있는가. 낮에는 관광, 밤에는 범행. 역할 분담도 장르의 수순대로다. 법대를 나온 둘째가 계획을 짜고, 프로레슬러였던 셋째가 완력을 맡고, 큰딸이 운전대를 잡고, 엄마는 의지를 맡는다. 여기까지는 각본가라면 누구나 자다가도 쓴다.

이 영화의 솜씨는 계약을 지키는 방식에 있다. 남자는 마취에서 깨어나 창고 포박을 풀고, 비닐을 뒤집어쓴 채 깡충깡충 국도를 달아나고, 수풀에 숨고, 식당에서 밥을 허겁지겁 퍼먹고, 급기야 경찰 제복을 입고 경찰차 운전대를 잡는다. 가족은 그 사이에 휴게소에서 간식을 사고, 절 앞에서 알리바이용 가족사진을 찍고, 숙소에서 케이크를 올린 차례상에 절을 한다. 장르의 법칙대로라면 추격이 거세질수록 가족은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노란 승합차에 식구를 태워 떠나는 저 유명한 로드무비의 법칙도 그렇게 돼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반대로 간다. 전직 프로레슬러인 셋째가 유치장 창살 안에 들어가 앉고, 법대를 나온 둘째가 그 바깥에 서서 동생을 내려다본다. 딸들은 하나씩 속엣말을 꺼내고 하나씩 차에서 내린다. 차는 부서지고 운전대는 엄마에게 넘어온다. 계약은 지켜진다. 다만 '가족이'라는 주어를 빼고 지킨다. 그 배짱에 감탄하다가 조금 분해졌다.

소품 하나로 영화를 재자면 쪽지다. 옥실은 손목의 염주를 돌리며 되새기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종이에 쓴다. 그놈만 죽이면 우리 가족도 새 마음 새 뜻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리고 질문지가 있다. 왜 그랬어. 경주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뭐야. 어떻게 책임질 거야. 세 줄이다. 옥실은 동네 수선집에서 손수건과 교복에 이름을 박아 주는 미싱사다. 글자를 바늘로 천에 새기던 손이 종이에 세 줄을 썼다는 것, 그 세 줄을 여덟 해 동안 접었다 폈다 했다는 것까지 소도구 담당이 계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쪽지는 영화가 초반에 관객 앞에 놓은 또 하나의 계약서다. 언젠가 이 질문이 그 남자 앞에서 읽힐 것이라는 약속. 티셔츠도 같은 계열의 장치다. 뒷모습에 '엄마', '첫째', '둘째', '셋째'. 넷째의 자리는 없고, 그 빈자리가 트렁크에 실려 있다. 그리고 사진이 있다.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경주 명소마다 찍는 가족사진이 어느 순간부터 죽은 아이의 빈자리를 세는 추모 사진으로 바뀐다. 거짓말하려고 든 카메라가 진실을 찍고 마는 셈인데, 각본은 이 전환을 대사 한 줄 없이 사진만으로 해낸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봉고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청테이프로 땜질한 노란 차는 이 가족이 가진 유일한 그릇이다. 네 사람과 트렁크의 한 사람을 한 칸에 담아 두는 물건이고, 운전석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곧 이 집의 권력 지도다. 처음에는 큰딸이 몰고, 딸들이 내릴수록 엄마가 몬다. 그리고 이 차가 부서진다. 그릇이 깨지고 나서야 엄마는 제 발로, 제 등으로 일을 마치러 간다. 자동차를 이렇게 쓰는 영화는 자못 드물다. 보통은 탈출 수단이건만 여기서는 함께 있을 핑계였다는 것이 깨진 다음에야 드러난다.
불만은 하나다. 산에서 내려오는 옥실에게 영화는 비를 내려 주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튿날 해가 뜨는 것까지 보여 준다. 비까지는 좋다. 사람 하나를 업고 올라갔다가 혼자 내려오는 여자에게 하늘이 무엇이라도 해 주어야 한다면 비가 맞다. 그러나 일출은 관객을 너무 얕본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자수하러 가는 낮이 이미 충분히 밝건만, 거기에 해까지 띄우는 것은 영수증에 도장을 두 번 찍는 일이다. 그 산 풍경을 두 해 걸려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해는 아껴 둘 일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보자. 딸들이 모두 내린 뒤 옥실은 남자를 등에 업고 경주가 내려다보이는 산을 오른다. 총도 칼도 아니다. 총은 이 집에 어울리지 않고 칼은 살이 닿아야 하니, 만든 이들이 어디까지 따져 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남는 것은 나무와 밧줄이다. 그 앞에서 옥실은 여덟 해 접어 둔 질문지를 꺼낸다. 그리고 한 줄도 묻지 않는다. 대신 다른 말을 한다. 너를 용서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고. 초반에 심어 둔 쪽지는 이렇게 닫힌다. 답을 받으려고 쓴 질문지가 답이 필요 없어진 순간에 펼쳐진다. 각본이 이 쪽지를 끝까지 들고 온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들고 온 다음에 읽지 않고 버린 것이 이 영화의 가장 뻔뻔한 선택이다. 나는 그런 종류의 악의를 사랑한다. 낮에는 관광, 밤에는 범행이라는 첫 조항도 끝까지 지켜진다. 마지막 일은 동트기 전 어둠 속에서 치러지고, 자수는 환한 낮에 이루어진다. 계약서의 글자 하나 고치지 않고 내용물만 통째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모름지기 복수극이란 죽일 수 있느냐를 묻는 척하면서 끝까지 갈 수 있느냐를 묻는 장르다. 「경주기행」은 끝까지 갔고, 가는 길에 식구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남은 것은 티셔츠 한 장이다. 사람 하나 업기에는 필경 너무 얇은 옷이다. 그 얇은 옷으로 끝까지 간 사람을 보고 나면, 두꺼운 옷을 입은 복수극들이 한동안 시시해진다. 그것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남긴 마지막 청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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