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0
테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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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내린 여자가 둘 있다
한 여자가 요트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햇빛 좋은 날이고, 그것을 본 사람은 뒤에 그 자유가 부러웠다고 말한다. 다른 영화에서는 한 여자가 호텔 창가에 앉아 있다가 뛰어내린다. 결혼기념일 밤이고, 그것을 본 사람은 남편이다. 두 장면은 열 해 차이로 만들어졌고 같은 감독의 것이다. 나는 이 두 번의 추락을 나란히 놓고 보려 한다. 두 영화가 같은 문제를 받아 들고 서로 다른 답을 적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규칙이 복잡한 세계에서 관객의 마음을 어디에 묶어 둘 것인가.
인셉션
2010년 영화다. 상영 시간은 148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그해 7월에 개봉했다. 코브는 남의 꿈에 들어가 생각을 훔치는 사람이다. 일본 기업가의 의뢰를 받아 경쟁사 후계자의 머릿속에 회사를 해체하라는 생각을 심어야 한다. 훔치는 대신 심어야 하니 꿈 속의 꿈, 그 속의 꿈까지 내려가야 하고, 그 설계를 위해 젊은 건축학도 아리아드네를 끌어들인다.
규칙은 아리아드네가 배우는 동안 우리도 배운다. 파리의 길거리에서 코브는 그녀에게 꿈을 설계하는 법을 가르치고, 그녀는 거리를 반으로 접어 올리고 거울을 늘어세워 길을 만든다. 코브는 거기서 한 가지를 당부한다. 너무 많이 바꾸면 꿈 주인의 무의식이 낯선 것을 알아보고 경계하기 시작한다는 것. 이 수업의 특징은 가르치는 쪽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코브는 이 세계를 안다. 모르는 사람은 아리아드네고, 관객은 그녀 옆에 선다. 규칙에 관해서라면 주인공은 늘 우리보다 앞에 있다.
대신 그는 다른 데서 뒤처져 있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꿈에 들어갔다가 엘리베이터 아래층에서 그가 숨긴 것을 본다. 아내 맬이다. 두 사람은 꿈의 가장 밑바닥에서 오래 함께 살았고, 맬은 그곳을 현실로 믿기 시작했다. 코브는 그녀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그녀의 머릿속 금고에 든 팽이를 돌려 놓았다.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을 심은 것이다. 그 생각은 현실로 돌아온 뒤에도 자라서, 맬은 현실마저 꿈이라 믿고 호텔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코브가 하는 일, 곧 생각을 심는 일이 그의 아내를 죽였다. 영화의 복잡한 규칙은 전부 이 한 사람의 죄책감 주위를 돈다. 작전 중에 맬이 자꾸 나타나 일을 망치는 것은 코브의 무의식이 자기를 벌주는 방식이고, 마지막에 그는 꿈의 밑바닥에서 아내의 모습을 한 것에게 당신은 그녀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하고 놓아준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감정은 주인공 안에 있다. 규칙을 아는 사람과 상처를 가진 사람이 같은 사람이다. 관객은 규칙은 아리아드네 옆에서 배우고 상처는 코브 옆에서 본다. 두 자리가 다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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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영화다. 상영 시간은 150분이고 우리나라에서 세계 어느 곳보다 먼저, 그해 8월 26일에 개봉했다.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자막은 그를 주도자라 부른다. 그는 시간의 방향이 거꾸로 흐르는 물건들, 그리고 그 기술로 세상을 끝내려는 무기상 사토르를 쫓는다.
규칙 수업은 이 영화에도 있다. 한 연구원이 주도자에게 벽에 박힌 총알이 총구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여 주고 말한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 아리아드네의 수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배우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주도자는 이 세계를 모르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다 알지 못한다. 관객은 그의 옆이 아니라 그의 안에 들어가 있다. 한 평은 이 영화를 두고 어떻게 했는지는 알겠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고 적었고, 대사가 음악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개봉 때부터 많았다. 그 불만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배우는 사람의 자리에 놓였기 때문에 생긴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르치는 사람 옆에 서면 모르는 것이 안심이 되고, 배우는 사람 안에 들어가면 모르는 것이 불안이 된다.
그리고 상처는 주인공에게 없다. 캣에게 있다. 캣은 미술품 감정사다. 위작 하나를 잘못 보증한 일로 남편 사토르에게 붙잡혀 있고, 남편은 아들을 포기하면 보내 주겠다고 한다. 그녀가 주도자에게 하는 긴 이야기가 하나 있다. 베트남에서 요트 휴가를 보내던 어느 날 남편과 크게 다투고 배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자가 요트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 자유가 부러웠다. 배에 올라가 보니 남편은 없었다. 영화는 이 이야기를 중간에 심어 두고 두 시간 뒤에 거둔다. 마지막 작전이 벌어지는 동안 그 요트에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온 캣이 있다. 그녀는 남편을 쏘고 바다로 뛰어든다. 부러워했던 여자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 영화가 캣에게 준 것은 상처만이 아니라 상처의 경로다. 중반에 그녀는 남편이 거꾸로 쏜 총알에 배를 맞고,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시간의 반대 방향으로 들어간다. 그 상처가 없었다면 그녀는 과거의 요트에 있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부러워한 자유는 그녀가 다쳐서 얻은 것이다.
반대 의견을 먼저 쓴다. 이 영화를 두고 가장 많이 나온 말은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주도자는 캣을 왜 그렇게까지 구하려 하는가.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다고도, 죄책감이 있다고도 말해 주지 않는다. 열 해 전 영화의 코브가 아내를 잃은 사람이라면 주도자는 잃은 것이 없는 사람이고, 잃은 것이 없는 사람의 목숨 건 모험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데우지 못한다. 어떤 평은 인물들이 기계 장치의 부품처럼 보인다고 썼다. 나는 이 반론이 옳은 데가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두 사람이 처음 만나 경매장에서 위작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만으로 뒤에 올 헌신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런데 같은 사실을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열 해 전 영화는 감정의 축을 주인공 안에 두었다. 그래서 규칙이 아무리 복잡해도 관객은 코브의 죄책감 하나만 붙들고 끝까지 갈 수 있었다. 그 대신 치른 값이 있다. 아내가 창가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과거이고, 그 영화의 어떤 규칙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결말이 놓아주기인 것은 그래서다. 코브는 팽이를 돌려 놓고 그것이 쓰러지는지 보지 않고 아이들에게 간다. 감독은 뒤에 한 인터뷰에서 그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가 팽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요점이라는 뜻이었다.
이번 영화는 감정의 축을 주인공 밖에 두었다. 주도자는 이름이 없고, 과거가 없고, 잃은 것이 없다. 캣에게는 전부 있다. 이 배치가 가능하게 한 것이 하나 있는데, 뛰어내리는 장면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둘 수 있다는 점이다. 맬의 추락은 일어난 일이라 코브가 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캣의 다이빙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그녀가 직접 가서 해야 한다. 한 영화는 되돌릴 수 없음을 택했고 다른 영화는 미리 보았으니 가서 하라는 쪽을 택했다. 앞의 것은 애도의 구조고 뒤의 것은 임무의 구조다. 임무에는 마음이 덜 든다. 그것은 결함이기도 하고 선택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도자가 캣을 구하는 이유를 영화가 설명하지 않은 것을, 나는 전부 결함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그는 캣의 사정을 듣고, 그녀가 부러워한 여자가 누군지 아는 자리에 결국 서게 된다. 그 여자를 거기 데려다 놓는 것이 그의 일이다. 사랑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사랑이면 더 좋았겠지만 영화는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이 선택 때문에 관객의 상당수가 두 시간 반을 어디에 마음을 둘지 모르고 보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열 해 전 영화가 두 자리를 다 마련했다면 이 영화는 한 자리를 비워 두었다. 비운 자리에 앉는 것은 보는 사람의 몫이 되었고, 누구나 그 수고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두 여자가 뛰어내린다. 한 사람은 남편이 심은 생각 때문에 떨어지고, 한 사람은 남편에게서 벗어나려고 뛰어든다. 한 영화는 그 추락을 결말에서 놓아주고, 다른 영화는 그 다이빙을 결말에서 실행한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영화인지는 묻지 않으려 한다. 남는 물음은 하나다. 부러워하던 자유가 결국 자기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그 앎은 위로인가 짐인가. 열 해 전 영화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번 영화는 묻고 답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이 차갑다는 영화에서 가져 나온 유일한 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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