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아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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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단어로 가라앉기
왜 이 영화는 물 위에서 시작할까? 아가미가 생긴 아이의 이야기인데 첫 장면의 주인공은 아가미가 없는 어른이고, 장소는 물속이 아니라 다리 위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한 층씩 내려간다. 나는 이 내려가는 순서를 단어 다섯으로 적어 보려 한다. 전부 명사 하나다.
수면
파리의 다리에서 해류라는 여자가 강으로 떨어진다. 직장과 어머니 돌봄에 지친 사람이고, 떨어진 것은 실수다. 누군가 그를 건져 올리고 사라진다. 영화는 이 수면에서 시작해 건진 사람의 과거로, 그 과거의 호수로, 호수 밑으로 내려간다. 한 평은 이 구조를 해수면에서 점점 깊이 가라앉는 것이라 썼고, 나도 그렇게 봤다. 감독은 물속에 들어가면 세상과 차단되는 느낌이 주는 온전한 행복이 있다고 말했다. 수면은 그 차단의 경계다. 위에 있으면 숨은 쉬어지는데 살기가 힘들고, 아래에 있으면 살기는 조용한데 숨을 쉴 수 없다. 이 영화의 인물은 전부 그 경계 어느 쪽에 서 있는지로 설명된다. 절반만 맞는 말일 것이다. 해류는 위에 있는데도 숨이 막혀 떨어졌고, 곤은 아래에 있는데 숨을 쉰다. 경계가 사람마다 다른 높이에 있다는 쪽이 더 맞겠다.
대야
노인과 손자가 사는 집에는 대야가 있고, 집 밖에는 호수가 있다. 공간으로 보면 이 집은 물을 둘 갖고 있다. 밖의 물은 곤이 발견된 곳이고 숨는 곳이며, 안의 물은 곤을 집 안에 두기 위한 장치다. 이것은 내 풀이다. 우리가 사는 집도 비슷하다. 밖에 강이 있는데 안에 욕조를 두고, 밖에 길이 있는데 안에 복도를 두고, 밖에 하늘이 있는데 안에 창을 둔다. 밖의 것을 작게 줄여 안에 들이는 것이 집이 하는 일이다. 대야는 호수를 줄여 안에 들인 것이고, 그래서 곤은 집에 있을 수 있다. 다만 줄인 만큼 좁다. 곤이 강하의 눈치를 보는 아이로 자라는 것은 영화가 보여 주는 사실이고, 그 좁음이 거기에 한몫했을 것이라는 것은 아마 그럴 것이라는 짐작이다. 물의 크기가 둘의 관계를 정한다고 나는 본다.
이름
아이에게 이름을 붙인 사람은 노인이 아니라 강하다. 강하는 그 이름을 할아버지가 아니라 자기가 지었다고 말한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상상의 물고기, 큰 바다를 헤엄치던 짐승의 이름이다. 이름을 짓는 일은 자리를 정하는 일이다. 아이에게 사람 이름이 아니라 물고기 이름을 준 순간, 강하는 아이를 집 안의 식구가 아니라 물의 것으로 분류했다. 그 분류가 둘 사이의 모든 일을 설명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것도 절반만 맞다. 강하는 그 이름을 자기가 지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들고 다닌다. 물고기라 부른 사람이 그 물고기를 제일 오래 기억하는 것이다. 이름은 분류였지만 동시에 소유였고, 소유는 시간이 지나면 책임으로 바뀐다.
비늘
물속 장면에서 아이의 등에 비늘이 번진다. 깊은 물은 거의 검고, 수면에서 빛이 내려오고, 그 빛을 받은 비늘이 색을 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되는 그림이다. 비늘은 곤이 사람 사이에 섞일 수 없는 이유이고 동시에 곤이 살아 있는 이유다. 감독은 아가미가 물에 빠진 생명을 구하는 능력이라기보다 물속에서 스스로 안식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비늘도 같다. 밖에서는 가려야 하는 것이, 물속에서는 빛을 받는 것이 된다. 어디에 있느냐가 같은 몸을 다르게 만든다. 사람도 그렇다. 같은 성격이 어느 자리에서는 결함이고 어느 자리에서는 재능이다.
안부
마지막 단어는 사건이 아니라 연락이다. 영화 뒷부분에서 해류는 강하와 곤 사이를 오간다. 영화 안에서 누군가 말한다. 「인어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마 제가 알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 연락으로 해류는 강하를 만나고,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괜찮아요?」라는 말과 함께 과거가 열린다. 그리고 해류는 멀리 떠난 곤을 찾아가 그 이야기를 전한다. 한 평은 이 영화가 거창한 구원 대신 짧은 문자 한 통과 사진 한 장, 이유 없는 안부가 사람을 다시 헤엄치게 한다는 이야기라고 썼다. 나는 거기에 하나 덧붙이고 싶다. 안부는 직접 가지 않는다. 사람 하나를 거친다. 뒷부분에서 강하와 곤은 서로가 아니라 해류에게 말한다. 중간에 사람이 있어야 전해지는 말이 있다.
다섯이 이어지는 자리
수면은 경계고, 대야는 그 경계를 집 안으로 줄여 들인 것이고, 이름은 그 안에서 아이의 자리를 정했고, 비늘은 그 자리가 아이의 몸에 남긴 것이고, 안부는 그 몸이 다시 세상과 닿는 유일한 길이다. 「어차피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 없는 물」이라는 대사가 영화 안에 있다. 바닥이 없으면 가라앉는 데 끝이 없다는 말인데, 동시에 어디서든 헤엄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가 후자를 택했다고 본다. 105분 동안 사람들은 계속 물에 빠지고, 매번 누군가가 건진다. 건지는 사람이 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이 다섯 단어의 결론이다.
물 위에서 시작한 이유는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는 길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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