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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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수거장 상자 접는 솜씨에 관한 보고
우리 아파트 분리수거장에는 토요일 아침마다 상자를 접는 어르신이 한 분 계신다. 접는다기보다 각을 잡으신다. 테이프를 떼어 내고, 바닥을 펴고, 네 귀를 맞춰 손바닥으로 꾹 눌러서, 상자가 아니라 결재 올라갈 서류처럼 쌓아 두신다. 관리사무소에서 나오신 분인지, 그냥 사시는 분인지, 혹은 종이 상자에 대하여 남다른 소명을 품으신 분인지 나는 모른다. 여쭤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저 각이 몸에 배기까지 몇 해가 걸렸는지, 그 세월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 같은 민간인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아무튼.
「인턴」 되겠다. 론칭 삼 년 만에 패션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는, 그러니까 업계 말로는 다크호스고 민간인의 말로는 잘나가는 회사가 된 그 회사에, 경력 삼십칠 년 차의 실버 인턴 한 분이 사원증을 받아 걸고 출근하시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오피스물이다. 줄거리라고 하기엔 다소 민망할 정도로 그게 전부다. 상영 시간은 백삼십이 분이고, 십일 년 전 미국에서 한 번 만들어진 이야기를 이 땅에서 다시 만든 것이다.
영화 좀 보셨다는 분들은 다음 수순을 이미 외우고 계실 것이다. 노인 신입은 초반에 애물단지여야 한다. 컴퓨터 앞에서 쩔쩔매고, 젊은 직원들은 뒤에서 수군대고, 대표님은 귀찮아하고, 그러다 어느 날 하필 그날, 하필 그 서류가, 하필 그 어르신만 아는 옛날 방식으로 해결되는 위기가 오고, 그다음은 화해와 포옹. 업계가 수십 년간 갈고닦은 표준 문안의 정수 되겠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다 차려진 밥상을 꽤 이른 시점에 물린다. 세대 갈등이라는, 기름지고 값싸고 언제나 잘 넘어가는 그 반찬을 거의 집지 않는다. 인턴 아저씨는 첫날부터 좋은 어른이시다. 묻기 전에는 조언을 건네지 않으신다. 갈등을 안 넣으면 뭘로 두 시간을 버티나 싶은데, 영화는 태연하게 버틴다. 나는 이 뱃심이 조금 놀라웠다.
면접 장면부터 그렇다. 목에 이름표를 걸고 앉으신다. 이름표에는 '면접자 김기호'라고 적혀 있다. 면접자. 서른일곱 해를 일하신 분을 면접자라 부르는 그 석 자에 나는 오래 걸렸다. 그 자리에서 그분은 옆자리 지원자와 악수를 나누신다. 떨어질 수도 있는 자리에서 옆 사람과 악수부터 하는 사람을 나는 실물로 본 적이 없다.

입사하신 뒤의 행적도 민원 넣을 구석이 없다. 옷이 산처럼 쌓여 아무도 손대지 않던 자리를 말없이 치우신다. 바쁜 선배를 대신해 현장에 가겠다고 자처하신다. 피곤해 보이는 대표님께는 당 충전하시라며 옛날과자 오란다를 꺼내 놓으신다. 손수건이 아니라 휴지를 건네신다. 손수건은 영화에서나 꺼내는 물건이고 사무실에 실제로 굴러다니는 것은 휴지라는, 이 지독한 사실주의.

압권은 마네킹이다. 어느 날 아침 그분은 마네킹을 들고 출근하신다. 인공지능을 붙들고 일하던 팀장님이 그 광경에 놀라신다. 나는 이 장면의 구도가 이 영화의 설계도 전체라고 본다. 한쪽은 화면 속에서 사람을 대신할 것을 만들고 있고, 한쪽은 사람 모양의 물건을 실제로 들고 들어온다. 두 사람 다 사람 비슷한 것을 다루는데, 무게가 다르다. 마네킹은 들어야 옮겨진다.
대표님 쪽도 상황이 간단치 않으시다. 삼 년 만에 회사를 키워 놓으셨으니 바깥에서 보기엔 더할 나위가 없는데, 안에서는 일과 집이 동시에 밀려든다. 회사 밖에서도 손에서 휴대폰이 떠나지 않으신다. 그 작은 화면을 인턴 아저씨 쪽으로 돌려 함께 들여다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즘 사람이 요즘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방식이 저렇다. 말로 하면 길고, 화면을 보여 주면 삼 초 되겠다. 다만 삼 초 만에 전달되는 사정이라는 건 대개 사정의 겉면뿐이다.

인턴 아저씨는 회사 바깥의 자리에서도 성실하시다. 플래그십 스토어 파티에서 회사 전속 모델님을 만나서도 깍듯하시다. 작은 가방 하나를 건네는 동작까지 공손하시다. 파티라는 곳은 원래 아무도 아무에게 깍듯하지 않기로 약속된 공간인데, 거기서 혼자 깍듯하시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저 어색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거의 유일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제자리를 벗어나 있을 때 생기는 어색함 말이다.

물론 따질 대목이 없지는 않다. 이번 판본에는 원작에 없던 부대표 한 분이 새로 배치되셨다. 연출을 맡은 쪽에서 긴장감을 위해 넣었다고 밝힌 자리인데, 막상 극 안에서 그 긴장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해명이 없다. 설계도에는 분명히 그려져 있는데 현장에 가 보면 그 자리가 비어 있는 식이다. 이를 설계 오류라 부를지 설계 여백이라 부를지는 보시는 분들의 성향에 달렸다.
제목에 대해서도 한마디 올리고 싶다. 인턴이라는 말은 본디 아직 다 되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되어 가는 중인 사람에게 붙이는 직함이다. 서른일곱 해를 어딘가에서 일한 분께 그 직함을 달아 주고, 목에 거는 끈까지 하나 주는 것이다. 이 제도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는 각자 짐작하실 일이다. 다만 끈을 목에 걸고 거울 앞에 서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그 끈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을.
조연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커피를 내리는 비슷한 연배의 아주머니, 열정이 과한 엠디, 같은 날 들어온 또 한 분의 인턴. 다들 한 번씩 나오셔서 한 마디씩 하시고 들어가신다. 등장과 퇴장 사이의 간격이 지하철 환승 통로처럼 짧다. 이 대목은 십일 년 전 그 영화도 똑같이 그랬으니, 리메이크로서는 대단히 충실했다고 해야겠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면은 인턴 아저씨가 잠시 직급을 내려놓고 인생 선배의 자격으로 대표님께 위로를 건네는 대목이다. 거기서 대표님이 우신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울 준비를 하고 있다가, 정작 울지는 않고, 다만 저런 말을 해 줄 사람이 회사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회사는 망해도 천천히 망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여기 적지 않겠다. 점잖아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의 끝을 모르시는 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실 것 같지 않아서다.
그게 다다.
그러고 나서 맞은 토요일 아침, 나는 분리수거장을 지나다가 그 상자 더미 앞에 잠깐 섰다. 여전히 각이 잡혀 있었다. 저 솜씨는 어디서 생긴 것인가. 삼십 년쯤 어딘가에서 뭔가를 반듯하게 맞춰 온 손이 아니고서는 나오기 어려운 각이다. 뭐, 솜씨라는 건 쓸 데가 있을 때만 솜씨라고 불린다. 쓸 데가 없어지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길어지면 고집이라고 불리고, 그러다 아무도 안 부르면 그냥 토요일 아침의 풍경이 된다.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도 대충 그 언저리였던 것 같다. 꺼내 놓을 자리만 있으면 사람은 자기가 평생 익힌 걸 꺼내 놓는다는 것.
다음 토요일에는 나도 상자 테이프라도 떼어 들고 나가 볼 생각이다. 각은 못 잡겠지만 옆에 쌓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어르신께 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여쭤볼 기회도 한 번쯤 생기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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