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철들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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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에 삼백만 원

정담뜰· 2026. 10. 26.· 2,212자

삼백만 원. 용접기사 철택의 통장에 든 돈이다. 암 4기 진단이 나오고, 병원비는 그 돈으로 어림도 없다. 영화는 이 숫자에서 멀리 가지 않는다. 가족극이라고 불리지만 돈이 먼저 나오고 가족은 그 뒤에 온다.

철택은 공사 현장에서 용접을 한다. 불꽃을 보고 사는 몸이다. 낙은 술과 로또다. 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담배와 술을 끊지 않는다. 몸이 하던 일을 몸이 계속한다. 이 사람은 자기 몸을 연장처럼 쓴다. 연장이 고장 났다고 해서 쓰는 법이 바뀌지 않는다.

딸 정미는 배우다. 맡는 역은 귀신 1, 친구 2. 이름이 없는 역이다. 카드값은 밀려 있다. 아버지의 진단이 나오자 간병을 자처한다. 병실에서 배역을 준비한다. 오디션이 있는 날 병원에 늦는다. 철택이 말한다. 「네가 하는 게 다 그렇지.」 간병은 일인데 일로 쳐 주는 사람이 없다.

오프닝에서 세 사람은 각자의 집에 있다. 각자 자기 일을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 딸은 딸의 일, 엄마는 엄마의 일. 모여서 밥 먹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가족극이 아니다.

이 영화의 일은 셋이다. 용접, 단역, 간병. 셋 다 몸을 쓴다. 셋 다 돈이 적다.

철들 무렵 스틸컷

돈 이야기는 서류로 온다. 철택은 기초생활보장을 신청하려 한다. 10년 넘게 별거한 아내가 법적으로는 아직 아내다. 서류가 거기서 막힌다. 정미는 효도계약서를 쓴다. 간병에 들인 시간과 돈을 적고 그만큼을 돌려받겠다는 문서다. 효도를 계약으로 쓰는 딸과, 아내를 서류로만 둔 남편. 둘 다 종이 앞에서 멈춘다.

철택의 옆 병상에 잠시 머물다 간 남자가 있다. 자식들의 고생을 보며 말한다. 「살아 있는 게 죄스럽더라.」 돌봄을 받는 몸이 하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환자의 몸은 돌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빚의 출처다. 살아 있는 동안 돈이 나간다.

정미는 큰아버지 관택에게 전화를 건다. 수술비를 도와달라는 전화다. 관택에게는 손자 동민이 있다. 돈은 어디서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철택은 노가다 현장으로 간다. 암 환자가 자기 수술비를 벌러 일터로 돌아간다.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고 가장 당연한 장면이다. 이 사람이 돈을 구하는 방법은 평생 하나였다. 몸을 쓰는 것. 몸이 망가진 뒤에도 같은 방법을 쓴다. 다른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간병이 이어지는 동안 두 몸이 반대로 움직인다. 정미는 처음에 기운이 넘쳤다. 시간이 가면서 시든다. 철택은 간병을 받으며 얼굴이 좋아진다. 한 사람의 몸이 나아지는 만큼 다른 사람의 몸이 닳는다. 영화는 이 교환을 설명하지 않고 두 얼굴을 번갈아 보여 준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거울 앞에서 소리를 지른다. 절망의 이유는 서로 다르다. 그날 밤 침대에서 숨죽여 운다. 그 뒤에 두 사람은 로또 1등 이야기를 한다. 가장 먼 돈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날이 선 말이 가라앉는다. 이 집에서 화해는 돈 이야기로 한다.

철들 무렵 포스터

엄마 현숙은 다른 쪽에 있다. 퇴임하고 혼자 노후를 보낸다. 형제 넷이 구순 노모 옥남의 부양을 현숙에게 넘긴다. 혼자 산다는 것이 이유다. 현숙은 남편의 병에도 딸의 불안에도 직접 나서지 않는다. 그 대신 구순 잔치의 진행을 떠맡는다. 돌봄을 피하는 사람도 잔치는 치른다. 잔치도 일이다.

옥남은 구순이다. 영화는 옥남의 영정 사진에서 시작한다. 옥남의 내레이션이 다섯 개의 장을 끌고 간다. 한 소설가의 문장을 빌린 장 제목 아래로 일제강점기와 민주화운동 시절의 기록 영상이 지나간다.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이 말한다. 잔치가 끝나고 옥남은 자식들에게 선언한다. 「나한테 니들은 과거.」 자식들과 같이 살지 않겠다는 뜻이다. 돌봄을 받을 차례인 사람이 돌봄을 거절한다. 거절도 일이다.

동민은 관택의 손자다. 관택은 동민을 자기 미래라고 부른다. 마지막에 동민은 식물 일기를 쓴다. 자라는 것을 적는 일이다. 이 집안에서 몸이 자라는 쪽은 동민뿐이다.

의견을 하나 적는다. 나는 이 영화가 돌봄 영화라기보다 노동 영화라고 본다. 누가 누구를 돌보느냐보다 누구의 몸이 얼마에 팔리느냐를 더 오래 보여 준다. 용접기사의 몸은 수술비가 안 되고, 배우의 몸은 이름을 못 얻고, 간병하는 몸은 계약서가 있어야 값이 매겨진다. 옥남이 자식들을 과거라고 부른 것은 그 값 매기기에서 빠지겠다는 말로 읽힌다. 그렇게 읽힌다는 것이지, 영화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105분이다. 인천에서만 찍었다.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데 웃는 장면이 많다. 웃음은 대개 돈 앞에서 나온다.

부모 병원비를 한 번이라도 계산해 본 사람이면 보면 된다. 안 해 본 사람은 보고 나서 계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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