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암살자(들)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노래하러 온 사람은 증거가 되었다

붓끝수다· 2026. 10. 31.· 2,630자

그날 식장에서 죽은 사람은 둘이다. 한 사람은 영부인이고, 한 사람은 합창단에 섰던 고등학생이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하나다. 나는 다른 하나를 세어 보기로 했다.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일어난 저격을 다룬다. 교포 2세 문태광이 총을 쏘고, 영부인이 쓰러지고, 범인은 그 자리에서 잡힌다. 정부는 발표를 하고 사건은 닫힌다. 그 닫힌 문을 형사 철구와 신문사 사회부장 재환, 신입 기자 영일이 다시 연다. 현장에서 총성은 여섯 번 울렸는데 발견된 탄환은 네 발이다. 영일은 문태광이 제압된 뒤에도 한 발을 더 들었다. 그리고 문태광이 서 있던 자리에서는 맞히기 어려운 위치에서 합창단원 최승화가 죽었다.

통념부터 성실하게 적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세 남자고, 영화가 묻는 것은 「누가 쐈는가」와 「누가 시켰는가」다. 제목의 괄호가 그 질문을 가리킨다. 암살자가 한 명인가, 여럿인가. 관객의 눈은 자연히 영부인에게 간 총알의 행방을 따라간다. 영화도 그렇게 짜여 있다. 사라진 두 발, 비표 없이 들어온 남자, 경호팀의 지시, 중앙정보부의 감시. 미스터리 추적극의 궤도다.

암살자(들) 스틸컷

나는 다르게 보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또렷하게 「맞은 사람」은 승화다.

승화가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다. 기념식장에 합창단원들과 줄지어 들어가다 영일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꼭 자기들을 인터뷰해 달라고 말한다. 그게 첫 장면이고, 그다음은 총성이 울린 뒤다. 영화는 승화가 서 있던 자리를 짚어 보여 준다. 그 자리에서 승화가 죽었다는 사실이 「문태광의 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영일이 끝까지 파고드는 힘도 그 웃음에서 나온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승화를 두 가지로 쓴다. 증거로, 그리고 동기로. 탄도의 모순을 증명하는 몸, 기자를 움직이게 하는 얼굴. 둘 다 승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증거는 수사하는 사람의 것이고, 동기는 기자의 것이다. 승화는 잠깐 웃고, 쓰러지고, 그 뒤로는 숫자와 이유로 남는다.

여기까지는 흔한 비판처럼 들린다. 영화가 어린 희생자를 도구로 썼다는. 그런데 그렇게만 말하면 거짓말이 된다. 이 영화는 승화를 지우지 않으려고 애쓴 영화다. 승화는 실제로 그날 죽은 고등학생을 바탕으로 만든 인물이고, 이 사건을 극영화로 만든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공식 기록에서 한 줄로 지나가는 죽음에 얼굴과 이름을 준 것은 이 영화다. 감독은 잊힐 수 있는 죽음을 관객이 기억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영일이 사건 뒤 승화의 학교를 찾아가 합창을 듣고 친구들을 만나는 장면도 찍었다. 죽은 친구를 두고 한 친구가 말하는 대사도 있었다. 그 장면은 편집에서 빠졌다.

빠진 이유는 모른다. 아마 길이였을 것이고, 아마 흐름이었을 것이다. 극장판은 두 시간을 조금 넘는다. 영화는 기자들이 선언문을 읽고 기관원들에게 짓밟히는 장면으로 끝나야 했고, 거기 도달하려면 어딘가를 잘라야 했다. 잘린 자리가 승화의 학교였다.

나는 그 선택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 선택이 무엇을 말해 주는지 묻고 싶다.

학교 장면이 빠지자 승화는 영화 안에서 「누구의」 죽음인지가 바뀐다. 친구들이 울어 주는 죽음이 아니라 기자가 기억하는 죽음이 된다. 친구의 대사가 남아 있었다면, 관객은 그날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두 사람의 무게로 들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나라가 애도하고, 한 사람은 교실이 애도한다. 지금 영화에서 승화를 애도하는 사람은 영일이고, 영일의 애도는 취재로 바뀐다. 애도가 일이 된다. 그건 기자에게는 옳은 일이지만, 승화에게는 어떤 일인가.

암살자(들) 포스터

승화의 자리에서 영화를 다시 보면 질문이 바뀐다. 「누가 시켰는가」는 승화에게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승화에게 중요한 질문은 「왜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총알이 왔는가」다. 영화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영화의 선택이고, 그 선택을 두고 바깥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도 승화는 거의 호명되지 않는다. 싸움은 「누구를 범인으로 그렸는가」를 두고 벌어지고, 「누가 맞았는가」는 양쪽 다 묻지 않는다.

제목의 괄호는 암살자가 여럿일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 괄호를 다른 낱말에도 붙여 보았다. 죽은 사람(들). 그 괄호는 영화도 치지 않았고, 영화를 둘러싼 말들도 치지 않았다.

영화가 승화를 놓쳤다고 말하면 틀린 말이다. 영화는 승화를 집었다. 다만 집어서 어디에 두었는가를 보면, 그 자리는 여전히 증거의 자리다. 탄환이 네 발이라는 것과 총성이 여섯 번이라는 것 사이에 승화가 끼어 있다. 숫자의 틈을 메우는 몸. 나는 그게 이 영화가 가장 잘한 일이면서 가장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잘한 것은 그 틈을 보이게 한 것이고, 못한 것은 틈 안에 사람을 넣어 둔 채 다음 장면으로 간 것이다.

내 해석도 의심한다. 영화는 두 시간 안에 형사와 기자와 저격범과 회장과 정보부를 다 다뤄야 했다. 거기에 여고생의 교실까지 넣으라는 것은 다른 영화를 만들라는 말일 수 있다. 그리고 빠진 장면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어쩌면 영화가 아니라 인터뷰를 보는 일이다. 극장에서 본 사람은 그 장면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 모르는 채로 승화의 웃음 하나로 충분히 울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묻게 된다. 영화 바깥에서 이 작품을 두고 벌어진 그 많은 말 중에, 노래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사람을 위한 말은 몇 줄이었나.

댓글

0 / 1,000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암살자(들)의 다른 리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