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암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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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구 씨, 조용히 사는 건 어땠어요

삐딱선· 2026. 10. 31.· 2,132자

영화를 보고 나온 날 밤에 바로 쓰려다가 못 썼어요. 쓰려고 앉으면 자꾸 그 계단이 생각나서요. (요즘 우리 집이 계단 있는 빌라로 이사를 해서, 밤에 불 끄고 올라갈 때마다 괜히 뒤를 돌아봐요. 이건 영화 탓이에요.) 사흘쯤 지나서야 편지라면 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 영화에 사람이 정말 많이 나오잖아요. 기자도 둘, 회장도, 검사도, 기관원도, 저격범도. 그런데 끝나고 집에 데려온 사람은 한 명이었어요. 중부서 경감 철구 씨예요.

철구 씨.

처음 장면부터 말할게요. 광복절 기념식 날, 비표 없는 남자가 들어오려고 할 때 철구 씨가 막았잖아요. 그 사람이 문태광이었고요. 그런데 경호팀이 들여보내라고 했죠. 철구 씨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나는 그 장면에서 이미 조마조마했어요. 그냥 직장인이 윗사람 말을 들은 것뿐인데, 그 한 번이 그날 전체가 되어 버리잖아요. 총성이 여섯 번 울리고, 영부인이 쓰러지고, 합창단에 섰던 학생이 죽고, 발견된 탄환은 네 발이고. 그리고 현장에서 같이 경호를 섰던 동료는 책임을 뒤집어쓰고 끌려가고요.

암살자(들) 스틸컷

두 번째는 그 계단이에요. 수사를 좁혀 가다가 누군가를 쫓아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 건물 안 학원에서 타자기 치는 소리가 박자처럼 섞여 들어오고, 철구 씨 앞에 조명이 쏟아져서 한 치 앞이 안 보이고, 그 빛 너머에서 누군가 권총을 겨눈 채 말하죠. 조용히 삽시다. 그러고는 가 버려요. 솔직히 말하면 그 장면에서 나는 범인이 누군지보다 철구 씨 얼굴이 더 보고 싶었어요. 빛 때문에 하나도 안 보이는데도요. 아니, 안 보여서 더요.

세 번째는 국기 하강식이에요. 경호계장을 찾아가서 진실을 말하라고 따지다가 두드려 맞고, 중앙정보부 건물을 터덜터덜 나오는데 뒤에서 하강식이 시작되죠. 다들 멈춰 서서 경례하는데 철구 씨만 등을 돌려요. 나는 거기서 울었어요. 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철구 씨가 나라를 미워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미워하지도 못하는 얼굴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집에 와서 표창장이랑 국기함을 집어던지면서 우는 장면은 그다음인데, 거기서는 오히려 안 울었어요. 이미 다 울어서요.

그리고 아들 일이 있었죠. 아들이 정체 모를 사람들한테 끌려갔다가 돌아오고, 철구 씨는 수사를 접어요. 경호 실패의 죄까지 떠안고요.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조용히 사는 건 어땠어요?

영화는 그 뒤를 길게 보여 주지 않아요. 마지막은 신문사예요. 재환 부장이 붓글씨로 쓴 선언문 앞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읽고, 기관원들이 유리문을 깨고 들어와 기자들을 짓밟는데도 끝까지 읽어요. 그건 기자들의 장면이에요. 그런데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자꾸 철구 씨를 생각했어요. 다들 조용히 안 살겠다고 외치는 영화에서, 조용히 살기로 한 사람이 어떤 얼굴로 그 신문을 받아 들었을지요. 다들 영웅이 되는 영화에서 철구 씨는 아빠로 남았잖아요. 두 아이가 있고, 아내 희자 씨가 있고, 아들이 돌아왔고. 그 선택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못 해요.

암살자(들) 포스터

그런데 또 이렇게도 생각해요. 철구 씨가 조용히 살기로 한 다음에도 철구 씨가 찾아낸 것들은 재환 부장 책상 위에 남아 있잖아요. 형사가 발로 뛴 것을 기자들이 글로 쓴 거잖아요. 그러니까 선언문 읽는 자리에 철구 씨가 없어도 철구 씨 몫은 거기 있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래야 내가 좀 편해서요. 영일 기자가 일본까지 날아가서 저격범의 형을 만나고 온 것도, 재환 부장이 수사본부 발표장에서 질문을 던진 것도, 다 철구 씨가 문 앞에서 그 남자를 한 번 막아섰던 데서 시작한 거라고요. 막은 건 철구 씨였어요. 들여보낸 건 철구 씨가 아니었고요.

하나만 더요. 영화 바깥에서 이 작품을 두고 말이 아주 많아요. 누가 쐈느냐, 누가 시켰느냐, 그렇게 그려도 되느냐. 나는 그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아요. 다만 그 많은 말 속에서 철구 씨 같은 사람,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했다가 그 한 번 때문에 인생이 통째로 흔들린 사람 이야기는 잘 안 들려서요. 그래서 편지라도 쓰는 거예요.

잘 지내세요. 계단 올라갈 때 뒤돌아보지 마시고요. 아, 이건 제 얘기였네요.

추신. 재환 부장이 회장 앞에서 그러잖아요. 어떤 게 득이 되는지 판단하는 건 국민 몫이고 기자는 진실을 전한다고. 그 말 들으면서 철구 씨 생각했어요. 철구 씨한테는 아무도 그런 근사한 대사를 안 줬더라고요. 그래서 더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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