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백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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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신 분께

심장쫄깃러· 2026. 10. 12.· 3,012자

클라크 씨, 이분께 먼저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누런 벽만 끝없이 이어지는 그곳에서 사흘 동안 술 한 모금 없이 지도를 그리셨다지요. 그 사흘 아침이 이분께 얼마나 오랜만의 아침이었을까요.

「백룸」은 2026년에 나온 영화입니다. 유튜브에 올린 짧은 영상 연작으로 시작한 이야기를, 그 영상을 만든 케인 파슨스 감독이 첫 장편으로 옮겼어요. 클라크는 건축가가 되지 못하고 가구점을 하는 분입니다. 손님이 없는 가게에서 잠을 자고, 병째로 술을 마시고, 상담사 메리에게 가서는 전처 이야기를 합니다. 이혼으로 집까지 잃으신 분이에요. 메리에게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어린 시절이 있지만, 오늘은 클라크 한 분만 읽어 보려고 해요. 많은 분들이 이분을 남 탓만 하는 사람이라고 보실 거예요. 그런데요,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이분의 행동을 한번 볼게요. 상담실에서 메리가 전처 역할을 맡아 집에서 쫓겨나던 그날 밤을 다시 해 봅니다. 술 냄새가 난다는 말에 이분은 화를 내요. 그러고는 곧바로 사과를 하십니다. 깨진 유리잔 이야기는 실수였던 것처럼 말씀하세요. 그 밤을 혼자서 몇 번이고 다시 재판하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가게 지하실 벽에서 빛나는 틈을 찾은 다음에는 달라집니다. 사흘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그 안을 돌아다니며 손으로 지도를 그려요. 무서워하기보다 궁금해하십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신 거예요.

백룸 스틸컷

왜 그러셨을까요. 이분은 건물을 짓고 싶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분 앞에 남은 건 팔리지 않는 소파와, 해적 모자를 쓰고 찍는 가게 광고예요. 밝은 얼굴로 손님을 부르는 광고 속 사람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거예요. 본인이 가장 믿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다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공간이 열렸어요. 그 안에는 이분의 가게를 베끼려다 실패한 것처럼 가구가 뒤엉켜 쌓여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분이 처음 온 사람이고, 처음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에요. 이건 이분이 이상해서가 아니에요. 사람은 자기가 쓸모 있다고 느끼는 곳으로 가요. 술을 멈추게 한 건 결심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날 이유였다는 뜻입니다.

백룸 스틸컷

그런데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어요. 이분은 가게 직원 캣과 캣의 남자친구 보비를 데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증거를 찍어 오겠다면서요. 안에 무언가 위험한 것이 산다는 말은 두 사람에게 하지 않으셨어요. 보비는 끌려가고, 캣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자신을 찾으러 들어온 메리의 목을 졸라 기절시키고, 식탁 의자에 묶어 놓고 상담을 다시 하라고 하세요.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 행동이 괜찮아지는 건 아닙니다. 그건 분명히 말씀드려야 해요.

그 식탁 장면을 한번 볼게요. 이분이 메리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하나였어요. 당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말, 내가 당신을 잘못 봤다는 말. 그래서 전처 역할을 다시 시키신 거예요. 그런데 메리는 다른 말을 합니다. 아내가 떠난 건 술이나 화 때문이 아니라 징징거림 때문이었다고요. 한 번도 당신 잘못이었던 적이 없고, 그래서 당신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이분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메리는 모르겠다고 해요. 정말로 모르겠다고요. 이 말에는 '맞는 말'만 있고 '건네는 손'이 없어요. 그래도 저는 메리를 탓하지 않습니다. 메리도 그날 거기서 처음으로 솔직했던 거예요. 다만 이분이 평생 들어 온 말과 똑같은 말이 하나 더 보태졌다는 게 참 안타까워요.

이분이 끝내 자기 말로 하지 못한 것이 있어요. 영화 앞부분에서 이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고, 그러고 싶지 않다고,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고요. 저는 이 말을 변명으로만 듣지 않았어요. 이분은 그 안에서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고 계신 거예요. 그 말 다음에 누군가 조금만 머물러 주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그런데 늘 그다음 말이 더 컸어요. 상담실에서도 그랬고, 메리에게 남긴 음성 메시지에서도 그랬습니다. 창문을 열었고 돌아가지 않겠다는 그 메시지는 메리가 쓰던 말을 빌려 온 것이었어요. 자기 말로 부탁하는 법을 이분은 배우지 못하셨던 거예요. 영화는 보여 주지 않지만, 아마 도와달라는 말을 해서 도움을 받아 본 적이 없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부탁 대신 증명을 하려고 하셨어요. 지도를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을 데리고 내려가서 보여 주려고요. 사람은 말로 안 되면 일로 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게 더 외로운 길인 줄 모르고요.

백룸 스틸컷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중요해요. 이분은 바뀌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세요. 메리는 그럼 바꾸지 말라고 합니다. 그때 문으로 들어온 것은 이분이 광고에서 입던 해적 옷을 입은, 이분을 닮은 커다란 존재예요. 이분은 그것에게 메리를 소개합니다. 우리 상담사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는 바뀌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리고 그것은 이분을 삼킵니다. 굉장히 무서운 장면인데, 저는 이분께 꼭 필요했던 건 그 존재가 아니라 그 앞에서 들은 말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럼 바꾸지 말라는 말. 누군가 처음으로 이분을 대신 끌고 가지 않은 거예요. 바뀌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그 말을 해 주는 쪽이 결국 자기를 먹는다는 것을 이분은 그제야 마주하셨을 겁니다. 이분이 처음으로 혼자 서서 고른 순간이었어요. 결과는 아프지만, 고른 건 이분이었습니다.

혹시 주변에 이런 분이 계신가요. 무슨 일이 생기면 늘 남 이야기부터 하는 분. 사과는 빠른데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분. 이야기를 들어 주다 보면 듣는 쪽이 먼저 지치는 분. 우리는 보통 두 가지 말을 해요. 「네 잘못 아니야.」 아니면 「또 시작이네.」 첫 번째 말은 이분이 메리에게 그렇게 받아 내려던 말이고, 두 번째 말은 이분이 평생 들어 온 말이에요. 둘 다 사람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말입니다. 저라면 이렇게 말해 보겠어요.

"누가 잘못했는지는 지금 안 따질게. 그날 밤에 네가 어땠는지가 궁금해."

잘잘못을 따지는 말은 이분이 이미 너무 많이 들으셨어요. 그날 밤 자기가 어땠는지를 물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질문 하나가 있었다면 이분은 창문 대신 문으로 나오셨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자기 마음을 궁금해해 주는 사람 앞에서 비로소 자기 말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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