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0
핸섬가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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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상궂은 사람이 범인일 확률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범인일 확률은 얼마일까. 이 질문을 들고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날 때쯤 질문이 하나 더 생겼다. 범인이 험상궂게 생겼을 확률은 얼마일까. 두 질문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다른 질문이다. 이 영화는 두 질문을 바꿔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착각 하나가 다섯 명을 죽이고 악마를 되살린다.
개념 하나: 조건을 뒤집으면 다른 수가 된다
내가 가져온 개념은 「조건부 확률의 뒤집기」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내용은 소박하다. 「A일 때 B일 확률」과 「B일 때 A일 확률」은 같은 수가 아니라는 것, 그런데 사람 머리는 이 둘을 자주 바꿔 쓴다는 것. 그게 전부다.
일상의 예를 셋 들어 보겠다. 첫째, 건강검진. 어떤 병이 있는 사람은 검사에서 거의 다 양성이 나온다. 그렇다고 양성이 나온 사람이 거의 다 그 병인 것은 아니다. 병이 드문 병이면, 양성 중 대부분은 멀쩡한 사람이다. 둘째, 스팸 메일. 스팸 메일에는 「무료」라는 말이 자주 들어간다. 그렇다고 「무료」가 들어간 메일이 다 스팸은 아니다. 동네 도서관 안내문에도 그 말은 들어간다. 셋째, 우산. 비가 오는 날에는 거의 모두가 우산을 든다. 그렇다고 우산을 든 사람을 봤다고 비가 온다고 단정하면 틀린다. 그 사람은 아침 예보만 믿고 나왔을 수도 있다.
세 예의 공통점은 「드문 것」이다. 병이 드물고, 스팸이 아닌 「무료」가 흔하고, 맑은 날 우산 든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뒤집은 확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는 그 「원래 비율」에 달려 있다. 범인은 드물다. 험상궂은 얼굴은 드물지 않다. 그러면 험상궂은 사람 중 범인의 비율은 어림잡아 아주 작아진다. 나는 이 계산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방향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적용: 다섯 번 뒤집힌 조건
영화에서 재필과 상구는 목수다. 두 사람은 시골에 집을 사서 이사 오고, 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염소를 발견해 묻어 주려고 봉투에 담아 옮긴다. 지나가던 경찰차가 그 모습을 본다. 험상궂은 두 남자가 밤에 뭔가 담긴 봉투를 옮긴다. 「시체 유기범은 밤에 봉투를 옮긴다」는 참이다. 그런데 「밤에 봉투를 옮기는 사람은 시체 유기범이다」로 뒤집히는 순간 두 사람은 용의자가 된다. 남 순경이 벌벌 떨면서 봉투를 열어 염소를 확인하고서야 오해가 풀린다. 나는 이 장면을 영화의 설계도라고 읽었다. 봉투를 열어 보는 사람과, 열어 보지 않고 얼굴을 보는 사람. 영화는 그 두 사람을 처음부터 나란히 세운다.
최 소장은 끝까지 봉투를 열지 않는 쪽이다. 그는 자기 눈을 「귀신눈깔」이라고 부른다. 강력반에서 오래 일한 눈이니 사람을 보면 안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그 말에서 두 번째 뒤집기를 봤다. 그가 잡아 본 범인들 중 험상궂은 얼굴이 많았던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범인이 험상궂을 확률」에 대한 경험이다. 「험상궂은 사람이 범인일 확률」은 그가 한 번도 세어 본 적 없는 수다. 그는 평생 한쪽 확률만 모으고 그걸 뒤집어서 썼다. 영화가 그 장면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건 병조의 신고를 받는 대목이다. 두 남자가 여자를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 최 소장이 묻는다. 그 남자들이 개를 키우던가. 병조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재필과 상구의 짓으로 단정한다. 개를 키우는 험상궂은 남자는 그 동네에 두 명뿐이었을 테니 추론으로는 맞다. 하지만 「데려갔다」가 「납치했다」로 바뀌는 과정은 아무도 검사하지 않았다.
세 번째 뒤집기는 친구들 쪽에서 일어난다. 미나가 물에 빠지고, 재필이 뛰어들어 구해 집으로 데려와 간호한다. 다음 날 아침 강용준이 집을 살피다가 미나와 상구가 함께 설거지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그것을 납치 피해자가 범인에게 정이 든 것으로 해석한다. 「납치된 사람이 범인과 친해지는 일」은 드물게 있다. 그러나 「범인과 친하게 설거지하는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납치 피해자일 확률은, 설거지하는 사람 전체 중에 납치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하면 거의 없다. 그는 이미 「납치」라는 결론을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에 설거지가 증거로 보였다. 결론을 먼저 들면 모든 것이 증거가 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영화가 좀 더 짓궂게 설계한 것이다. 재필이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다가 말벌 떼에 쫓겨 뛰는데, 멀리서 보면 전기톱을 든 남자가 사람을 쫓는 그림이 된다. 집 앞에는 관 모양으로 짜인 화단이 있고, 친구들은 그걸 미나의 관으로 본다. 두 장면 모두 「살인마라면 그렇게 보일 것이다」가 참이고, 「그렇게 보이면 살인마다」가 거짓이다. 영화는 참인 쪽을 화면에 보여 주고, 거짓인 쪽을 인물들의 머릿속에 넣는다. 관객은 양쪽을 다 보기 때문에 웃는다. 인물들은 한쪽만 보기 때문에 죽는다.
그리고 결말이다. 지하실 바닥의 별 그림에는 사람이 죽을 때마다 불이 하나씩 켜지고, 다섯 번째 불이 켜지자 악마가 성빈의 몸으로 되살아난다. 신부가 가져온 옛 책에는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매한 자」의 도움으로 악마가 돌아온다고 적혀 있었다. 영화는 그 우매한 자가 최 소장이라고 거의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봉투를 열지 않은 사람, 조건을 뒤집어 쓴 사람이 악마의 문을 연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 결말을 「확률을 뒤집어 쓴 사람에 대한 영화의 판결」로 읽었다. 이것은 내 해석이고, 영화가 그런 단어를 쓴 적은 없다.
마지막 장면은 더 정직하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두 사람이 무혐의로 풀려나는데, 결정적인 것은 경찰차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이다. 얼굴이 아니라 기록이 두 사람을 구한다. 봉투를 열어 보는 일을, 끝에 가서 기계가 대신 해 준 것이다.
안 맞는 곳
개념이 안 맞는 곳도 적어 둔다. 첫째, 악마는 확률이 아니다. 예언에는 날짜와 머릿수가 미리 적혀 있다. 염소가 죽고 다섯 악인이 죽으면 악마가 돌아온다. 이건 「드문 사건의 비율」이 아니라 정해진 순서다. 최 소장이 봉투를 열었더라도 다섯 명이 죽지 않았을지는 영화가 말해 주지 않는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들은 염소를 치어 놓고 웃었고, 미나만 묻어 주자고 했다가 무시당했다. 영화는 벌을 줄 사람을 확률이 아니라 행실로 고른다.
둘째, 미나가 악마를 쏘는 장면은 갱신이 아니라 결단이다. 그는 봉투를 열어 본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재필과 상구를 사람으로 봤고, 끝에는 네일건에 은탄을 물려 악마의 이마에 박았다. 확률을 아무리 잘 뒤집어도 네일건은 나오지 않는다. 거기서부터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다.
그래도 영화를 다 보고 남은 생각은 이것이다. 우주는 험상궂은 얼굴과 범인 사이에 아무 뜻도 심어 두지 않았다. 그 둘을 이어 붙인 것은 사람이고, 이어 붙인 자리에 의미가 있다고 믿은 것도 사람이다. 이 영화는 그 믿음이 틀렸다고 말하는 대신, 틀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한 집에 모아 놓고 하나씩 치웠다. 그러고도 끝에는 두 사람의 혐의를 벗겨 주고, 미나와는 친구로 남게 한다. 나는 그 너그러움이 조금 놀라웠다. 틀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가 다시 세어 볼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험상궂은 사람이 범인일 확률은 얼마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답은 「생각보다 훨씬 작다」로 바뀌었다. 그 답도 틀릴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봉투를 열어 보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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