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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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편하다고 말해 오신 분께
이분께 먼저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동안 얼마나 많이 혼자 삼키고 계셨을까요.
영화 군체에서 권세정이라는 분을 보았습니다. 생명공학을 하는 분이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 탓에 교수 재임용에서 떨어진 분이에요. 새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전남편의 말을 듣고 그가 일러 준 빌딩의 컨퍼런스에 갔다가, 하필 그날 그 건물에 갇히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분을 보고 참 강단 있는 사람이라고, 위기에서 빛나는 리더라고 하실 거예요. 그런데요, 저는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저는 이분이 아주 오래 혼자였던 사람으로 보였어요.

이분의 행동을 한번 볼게요. 이분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셨습니다. 재임용 심사를 앞둔 사람이 불편한 장면 하나를 못 본 척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한 번만 지나가면 자리가 지켜지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걸 못 하셨어요. 그 자리에서 이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결과는 분명해요. 자리를 잃으셨습니다.
이건 이분이 유별나서가 아니에요. 사람은 보통 둘 중 하나를 지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거나,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거나. 둘 다 지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이 늘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아요. 이분은 두 번째를 지키는 쪽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분들 곁에는 사람이 잘 안 남아요. 옳은 말을 하는 사람 옆에 오래 서 있는 건 생각보다 품이 드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이분 곁에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영화에서 이분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헤어진 남편이에요. 이미 헤어진 사람이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분이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내 오셨는지를 조용히 알려 줍니다.
장면 하나를 더 볼게요. 건물이 봉쇄되고 다들 격앙되어 있을 때, 이분은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십니다. 감염된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달라지는 것을, 소리 지르는 대신 가만히 지켜보세요. 많은 분들이 이걸 보고 역시 공부한 사람이라 침착하다고 하실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침착함이 조금 마음에 걸렸어요. 오래 혼자 결정해 온 사람의 침착함처럼 보였거든요. 이분이 학교에서 들은 결론은 '재임용 탈락'이었습니다. 그 말에는 '결과'만 있고 '사람'이 없어요. 이분이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은 아마 다른 것이었을 거예요. 그 말 꺼내기까지 많이 망설이셨겠다, 하는 한마디였을 겁니다.

이분이 그 건물에서 한 일을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감염된 사람들의 행동과 달라지는 방식을 읽어 내고, 남은 사람들을 모아 밖으로 나갈 길을 찾으세요. 건물 곳곳을 뛰어다니십니다. 공개된 한 장면에서는 휴대폰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누군가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어요. 저는 이 자세가 이분을 참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와 달라고 먼저 말하는 대신, 혼자 길을 찾아낸 다음 그 답을 남에게 건네는 쪽을 택하는 분이에요.

이분은 전남편을 잃는 순간에도 크게 울지 않으십니다. 감정을 혼자 삭이세요. 저는 여기서 이분을 조금 더 알게 됐어요. 슬프지 않아서 안 우는 게 아니라, 울어도 받아 줄 사람이 옆에 없는 시간을 너무 오래 보낸 거예요. 혼자 삭이는 건 타고나는 성격이 아니라 살면서 익히는 기술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고 싶어요. 혼자 감당하는 게 익숙해지면, 옆 사람이 내미는 손도 잘 안 보이게 됩니다. 이분이 외로웠던 데에는 세상의 몫이 크지만, 내민 손을 늦게 잡는 버릇만큼은 이분의 몫이에요.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중요해요. 영화 끝에서 이분은 공설희라는 분과 마주 봅니다. 감염된 사람들은 끈적한 것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여요. 그런데 이 두 분은 그런 식이 아니라, 그냥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게 이분께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평생 혼자 판단하고 혼자 감당해 온 분에게 필요한 건 더 큰 무리에 섞이는 일이 아니거든요. 나를 알아보는 한 사람을 만나는 일입니다. 한 명이면 충분해요.
혹시 주변에 이런 분이 계신가요. 옳은 말을 했다가 손해를 보고도 괜찮다고 하시는 분. 힘든 일을 혼자 다 처리해 놓고 나중에야 지나가듯 말씀하시는 분. 그런 분께는 잘했다거나 대단하다는 말보다 먼저 건네면 좋은 말이 있어요. 결과를 칭찬하면 그분은 다음에도 또 혼자 해내야 하거든요. 이렇게 한번 말해 보세요.
그 말 꺼내기까지 많이 망설이셨겠어요.
이 한마디에는 결과가 없고 사람만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덜 외로워져요. 혼자 버티는 데 익숙해진 분일수록 이런 말 한마디에 오래 머무십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분께도 누가 저 말을 한 번만 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어요. 사람은 여러 사람에게 이해받아야 사는 게 아니라, 한 사람에게 제대로 알아봐지면 다시 설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이 글은 전문가의 견해가 아니라 한 관객의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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