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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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에 거는 명찰 줄이 싫다
나는 목에 거는 명찰 줄이 싫다. 플라스틱 케이스에 든 것은 더 싫다. 행사 로고가 인쇄된 것은 참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명찰 줄은 사람을 조금씩 작게 만든다. 길이도 늘 틀렸다. 어른의 명치 근처에서 달랑거리는 물건에 자기 이름을 넣어 걸고 다니라는 발상이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이 영화는 그 줄을 목에 건 사람들이 가득한 건물에서 시작한다. 서울 도심의 초고층 빌딩. 생명공학 컨퍼런스. 정장과 명찰과 안내 데스크. 그리고 몇 분 뒤 건물이 통째로 봉쇄된다. 나는 이 설정이 좋았다. 명찰을 걸고 모인 사람들을 한 건물에 가두는 것으로 이 영화는 할 말의 절반을 끝내 버린다.
주인공을 그 건물로 보내는 방법도 짚어 두자. 전 남편이 새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며 컨퍼런스를 알려 준다. 나는 이런 식의 도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물을 사건 현장에 갖다 놓으려고 급히 만든 핑계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핑계가 짧다. 세 마디로 끝내고 바로 건물을 잠근다. 길게 변명하지 않는 것도 솜씨다.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이유는 하나다. 이 영화는 좀비에게 조직을 준다. 감염자들은 혼자 달려들지 않는다. 일제히 멈춰 서서 서로의 정보를 맞춘 다음, 전원이 같은 수준으로 똑똑해져서 다시 움직인다. 전체 공지를 돌린 조직이 하는 일을 떼가 한다. 명찰로 등급을 나누던 사람들이, 이름도 직함도 없이 완벽하게 합의된 무리에게 쫓긴다. 이보다 더 사무실다운 공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좀비의 생김새에 대해서도 말하겠다. 나는 예쁜 좀비가 싫다. 이 영화의 감염자들은 예쁘지 않다. 피를 뒤집어쓰고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점액이 몸에 붙어 있다. 처음에는 네발로 긴다. 다음 단계에서 두 발로 선다. 그다음에는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낸다. 단계마다 생김새가 조금씩 사람 쪽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나아지는 게 아니라 나빠지는 쪽으로 읽힌다. 분장이 이야기를 대신한 드문 경우다.
솔직히 말하자. 이야기는 예상한 대로 간다. 누가 남고 누가 사라질지 중반쯤이면 대충 보인다. 인물들은 설명 한 줄씩만 들고 등장한다. 완성된 영화는 122분이고, 감독은 처음 168페이지였던 시나리오를 100페이지로 줄였다고 말했다. 줄인 쪽이 설명이었다는 것은 보면 안다. 속도는 빠르면 그냥 빠른 것이다. 빠른 것과 촘촘한 것은 다르다.
그래도 이 영화가 사는 자리는 따로 있다. 옷과 공간이다. 생존자들이 기어들어 가는 피난처가 등산복 매장이라는 선택을 보라. 방수와 보온과 수납이 전부인 옷들로 둘러싸인 방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마네킹과 입간판 사이에 숨는다. 사람이 마네킹인 척해야 하는 방에 기능성 재킷이 걸려 있다는 그림은, 설명 없이도 이 건물이 어떤 곳인지 알려 준다.

옷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다. 이 영화의 옷은 대체로 정확하다. 노란 방호복은 바보처럼 눈에 띄고, 그래서 맞다. 가슴에 보안이라고 박힌 회색 점퍼도 맞다. 그 옷을 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딱 그 옷만큼이라는 것을 관객이 바로 안다. 틀린 옷은 하나다. 주인공의 옷이 너무 자주 깨끗하다. 점액과 피를 뒤집어쓴 것들과 하루 종일 부딪히는 사람의 차림치고는 지나치게 단정하다. 후반에 가서야 피 묻은 외투를 걸치는데, 그 전까지의 말끔함을 전부 덮어 주지는 못한다.
내가 제일 오래 들여다본 그림은 로비 장면이다. 피를 뒤집어쓴 감염자 수십이 건물 로비에 서서 일제히 같은 쪽 위를 올려다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떼가 달려들 때보다 이렇게 서 있을 때가 훨씬 무섭다. 사람이 저렇게 한꺼번에 같은 방향을 보는 장면은 회사와 학교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 거기서는 그걸 집중이라고 부른다.
추격 장면도 공간을 쓴다. 이 영화의 사람들은 넓은 데서 달리지 않는다. 에스컬레이터, 계단참, 유리문, 주차장 경사로. 건물에 원래 있던 것들로 거리를 벌었다가 잃는다. 무술을 짠 사람이 액션의 단위를 주먹이 아니라 동선으로 잡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싸움이 세 보이지 않는데도 긴장이 유지된다. 이기는 장면이 거의 없고 도망치는 장면만 잘 짜여 있다는 점이, 이 영화가 자기 분수를 안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의 태도를 좋아한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이 있다. 연민을 구걸하는 클로즈업. 떨리는 입술. 느린 피아노 위에 얹히는 유언.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 죽기 직전에 길어지는 대사. 이 영화에는 그게 거의 없다.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지고, 남은 사람은 울지 않고 다음 문을 연다.
품위란 그런 것이다. 상황이 나빠졌을 때 목소리를 키우지 않는 것. 소리를 지르는 대신 상대가 무엇을 배웠는지 보는 것. 이 영화의 주인공이 하는 일이 정확히 그렇다. 그는 떼를 미워하지 않고 관찰한다. 미워하는 쪽은 오히려 사람이다. (물론 소리를 질러야 하는 순간도 있다. 이 영화에도 있다.)
만든 쪽의 선택도 하나 짚고 싶다. 이 떼의 움직임은 현대무용팀과 함께 짠 것이라고 한다. 감염자들이 멈춰 설 때 어깨와 목이 같은 박자로 흔들리는 이유가 거기 있다. 안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더 이상해진다. 좀비에게 발레를 시키는 것은 보통 과한 짓인데, 뇌를 공유하는 떼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생각이 하나면 동작도 하나다. 그 한 줄을 설명 대신 몸으로 보여 준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비싼 결정이다.
악당이 등장하는 방식도 취향이다. 공개된 스틸에서 서영철은 거울이 마주 보고 선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얼굴이 끝없이 반복되어 비친다. 한 사람이 수백 개로 늘어나는 그림이다. 뇌를 전부 하나로 잇겠다는 자를 소개하는 데 이보다 간단한 방법은 없다. 대사 한 줄 없이 그가 원하는 세계를 보여 준 셈이다. 나는 이런 식의 소개를 좋아한다. 설명하지 않고 배치만 하는 것.

감독은 AI가 보편적인 생각의 총합으로 움직인다면 소수에 속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명찰 줄과 같은 소리로 들린다. 명찰은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거는 것이 아니다. 빨리 분류하기 위해 거는 것이다. 분류되지 않는 사람은 줄을 받지 못한다. 이 영화의 떼는 그 분류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전원이 같은 것을 알고, 아무도 다른 것을 모른다.
바깥과 이어진 선도 가늘게 하나 남아 있다. 공설희는 건물 밖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 틈에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는 그림은,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차이를 한 장으로 보여 준다. 재난물에서 바깥 사람들은 보통 무능하거나 악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는 그 손쉬운 길로 가지 않는다. 밖에 있는 사람도 그냥 사람이고, 전화기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극장 이야기.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로 걸렸고, 큰 화면과 흔들리는 의자와 양옆으로 넓어지는 화면까지 여러 포맷으로 상영됐다. 나는 보통 이런 포맷 장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떼가 일제히 멈추는 장면만큼은 화면이 클수록 유리하다. 멈춘 것이 몇인지 세어 볼 수 있어야 무서운 장면이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목이 한 번에 꺾이는 그림은 작은 화면에서 그냥 어두운 덩어리가 된다.
제목도 한마디 하겠다. 나는 뜻을 미리 알려 주는 제목이 싫다. 보기 전에 답을 받아 드는 기분이 들어서다. 군체라는 두 글자는 대놓고 답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맞다고 본다. 이 영화가 숨기려는 것은 떼의 정체가 아니라 떼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무엇인지는 처음부터 알려 주고,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로 관객을 조인다. 답을 먼저 주고도 긴장이 남는 영화라면 제목이 친절해도 용서가 된다. 포스터도 같은 태도다. 여섯 사람의 얼굴을 초록색 실 같은 것이 사방으로 이어 놓았고, 그 위에 새로운 진화의 시작이라고 적혀 있다. 숨기는 게 하나도 없다. 나는 이런 뻔뻔함이 차라리 정직하다고 본다.

그래서 마지막이 마음에 든다. 설계자가 죽고 떼가 일제히 굳은 뒤, 그중 하나가 혼자 깨어나 소리를 지른다. 전체 공지를 받지 못한 한 마리다. 조직에서 가장 성가신 존재이고, 이 영화가 끝에 남겨 둔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다. 나는 이 마무리가 불친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깔끔하게 닫았다면 오히려 이 영화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리하자. 이야기는 뻔하다. 옷과 공간은 똑똑하다. 떼는 훌륭하다. 셋은 모순이 아니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은 물건으로 끌고 간 영화는 생각보다 드물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명찰 줄이 싫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더 싫어졌다. 저걸 목에 걸고 모인 사람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봤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 줄을 받으면 주머니에 넣고 다닐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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