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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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퍼 소리가 멎을 때까지

삐딱선· 2026. 10. 24.· 2,917자

"This car is very you." 애니가 이고르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면서 그렇게 말해요. 이 차 딱 너 같다고. 이고르가 되묻죠. 마음에 드냐고. 애니는 아니라고 해요. 단칼에요. 나는 이 짧은 대화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139분짜리 영화에서 마지막 몇 분이 그 앞의 두 시간을 통째로 다시 보게 만들었거든요.

순서를 거슬러 올라가 볼게요. 애니는 브루클린의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스물셋이에요. 본명은 아노라인데 애니로 불리길 원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할머니와 말을 트려고 배운 러시아어 덕에 러시아 재벌 아들 이반의 담당이 돼요. 일주일 1만 5천 달러짜리 여자친구 계약, 라스베이거스, 즉흥 결혼, 큼직한 반지와 모피 코트. 여기까지는 예고편만 봐도 아는 이야기죠. 영화 첫 장면 클럽에서 흐르던 노래가 결혼식 장면에서 그대로 다시 흘러요. 춤추며 돈 버는 장면과 결혼하는 장면에 같은 곡을 깔아 놓은 건데, 그때는 그냥 신났고 나중에 생각하니 좀 무서웠어요. 그다음에 이반의 부모가 보낸 세 사람이 저택에 들이닥치고, 이반은 혼자 도망치고, 애니는 그 세 사람과 함께 밤새 브루클린을 뒤지며 남편을 찾아요. 소동극은 길고 시끄럽고 솔직히 말하면 꽤 웃겨요. 그런데 영화는 그 웃음을 마지막에 와서 전부 회수해 가요. 감독도 인터뷰에서 그걸 노렸다고 했어요. 왜 아까 웃었나 스스로 묻게 되는 자리까지 관객을 데려가고 싶었다고요.

내가 붙잡힌 장면은 두 개예요. 빨간 스카프, 그리고 눈 내리는 차 안.

스카프부터요. 저택 침입 장면에서 애니는 물고 소리치고 손에 닿는 걸 다 깨뜨리면서 버텨요. 그 애니의 입을 막는 데 쓰이는 게 빨간 스카프예요. 그런데 똑같은 스카프가 그날 밤 추운 바깥에서는 애니의 목을 감싸 주는 데 쓰여요. 입을 막았던 천이 몸을 덥히는 천이 되는 거죠. 그리고 혼인 무효가 확정된 자리에서 애니는 그 스카프를 원래 주인인 이반의 어머니에게 던져서 돌려줘요. 모피 코트도 벗어 버리고요. 한 장의 천이 폭력이었다가 온기였다가 결별 선언이 돼요. 의상을 맡은 분이 인터뷰에서 스카프는 빨간색이어야 한다고 대본에 적혀 있었다고 했는데, 나는 그 색이 아니었어도 울었을 것 같아요. 아니, 울었어요. 어느 대목에서였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스카프가 목에 감기는 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스카프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아노라 스틸컷

이제 차요. 이고르는 할머니 집에 살고, 애니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그 차도 할머니 차예요. 뉴욕에 눈이 내리고, 이고르는 애니의 짐을 현관까지 옮겨 준 다음 다시 차에 타요. 토로스가 약속한 돈을 건네고, 그다음에 반지를 꺼내요. 저택에서 토로스가 애니 손가락에서 빼 간 그 결혼반지요.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번갈아, 크게 잡는 건 반지가 나오기 직전 그 자리가 처음이에요. 애니는 자기가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하려 하고, 이고르가 입을 맞추려 하자 멈춰요. 그리고 그 사람 가슴을 치다가 울어요. 화면이 꺼지고 엔진 소리와 와이퍼 소리만 남아요. 음악은 없어요.

그 전날 밤 둘은 이런 말을 주고받았어요. 이고르가 "너 그 집안 식구 안 되길 잘한 거야"라고 하자 애니는 "내가 네 망할 의견 물어봤어?"라고 받아쳐요. 넌 강간범의 눈을 가졌다는 말까지 해요.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다음 날 아침 반지를 돌려줘요. 아무 조건 없이요. 감독은 관객이 저마다의 에필로그를 써 내려가길 바랐다고 했는데, 나는 에필로그를 못 썼어요. 와이퍼 소리에 막혀서요.

(여기서 딴소리 하나. 나한테도 할머니 차가 있었어요. 정확히는 할머니가 엄마한테, 엄마가 나한테 물려준 은색 소형차. 열쇠를 돌려야 시동이 걸리고 뒷좌석에는 늘 할머니가 쓰던 방석이 있었죠. 친구들이 타면서 "이 차 딱 너다" 하면 나는 꼭 "아니야"라고 했어요. 그 차가 창피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디서 왔는지 들킨 기분이 들어서요.)

그래서 나는 애니의 "아니"를 차가 싫다는 말로 못 들었어요. 애니는 영화 내내 아노라라는 이름을 밀어내고 애니로 살려 하는 사람이에요. 할머니의 언어는 돈 버는 데만 쓰고요. 이고르는 반대로 할머니 집에서 할머니 차를 몰며 그 뿌리 위에 그냥 앉아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이 차 딱 너 같아"는 아마 칭찬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리고 "마음에 들어?"는 아마 차 얘기가 아니었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들었어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애니가 울음을 터뜨린 건 이고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이고르가 뭘 하나도 잘못하지 않아서였을 거예요. 이것도 내 풀이예요. 영화는 답을 주지 않고 꺼져요.

그러고 보니 이고르는 영화에서 애니보다 아노라라는 이름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아노라에는 빛이라는 뜻도 있고 석류라는 뜻도 있다고 하죠. 애니는 그 이름을 접어 두고 사는데, 그 이름을 펴서 불러 주는 사람이 자기 입을 막았던 사람이라는 게 이 영화의 못된 구석이에요.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까지, 그리고 그 말을 받기까지 두 사람 다 너무 오래 걸렸어요. 아니, 애니는 끝까지 못 받았죠. 받으려고 손을 뻗다가 울었으니까요.

아노라 포스터

처음 만났을 때 이반이 애니한테 묻는 말이 있어요. "What are you looking for?" 뭘 찾고 있냐는 뜻으로도, 뭘 원하냐는 뜻으로도 읽히는 말이죠. 영화는 그 질문을 두 시간 넘게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그 답을 아는 것 같은 사람을 조수석 옆에 앉혀 놓고 애니가 거절하는 걸 보여 줘요. 신데렐라 이야기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눈 오는 날 주차된 차 안에서 나오게 되는 영화예요. 그 차는 작고 낡았지만 히터는 켜져 있었을 거예요.

볼까 말까 망설이는 분께는 보시라고 하겠어요. 다만 끝나고 바로 일어나지 말고, 와이퍼 소리를 끝까지 들으세요. 그 소리가 멎을 때까지가 영화예요.

추신. 은색 소형차는 지난봄에 폐차했어요. 마지막 날 "이 차 딱 나다" 하고 혼자 말해 봤는데, 좀 늦었죠. 애니는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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