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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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반바지 위에 맞춤 재킷

밤선율· 2026. 10. 24.· 2,291자

결론부터. 이 영화에서 가장 정확한 옷은 신랑의 농구 반바지다. 가장 정확한 공간은 신랑 부모의 집이다. 둘 다 틀린 것처럼 보여서 맞다. 나는 두 시간 넘게 그 틀림을 보며 앉아 있었고, 지루하지 않았다.

스타일 얘기를 하겠다. 옷 두 벌과 집 한 채. 줄거리는 필요한 만큼만 건드린다.

물건 1 · 라스베이거스 결혼식 복장

신부 애니는 크림색 뷔스티에에 청반바지. 신랑 이반은 맞춤 블레이저에 농구 반바지. 결혼식장에서 이런 조합을 본 적이 있나. 나는 없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본 뒤로 결혼식 복장이란 걸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반의 옷은 틀렸다. 위는 재단사가 손댄 재킷이고 아래는 체육 시간 바지다. 상반신은 아버지의 돈으로, 하반신은 자기 나이로 입은 셈이다. 이 애는 스물한 살이고, 미국에 노는 데 와 있고, 결혼이 뭔지 모른다. 옷이 그걸 다 말한다. 그래서 틀린 채로 맞다. 의상 담당도 이 조합을 부유하지만 덜 자란 인물의 표시로 골랐다고 했다. 의도된 틀림이다. 의도가 보이면 나는 봐준다.

애니의 옷은 맞다. 뷔스티에와 청반바지는 결혼식 옷이 아니라 놀러 나온 옷이다. 신부는 그 옷차림 그대로 서명을 한다. 의상 담당은 그 차림이 힘 있어 보이면서도 열려 있고 무방비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봤다. 그날 애니는 꾸미지 않았다. 꾸미지 않은 사람이 제일 많이 믿고 있었다. 그게 이 장면에서 제일 아픈 지점이다.

아노라 스틸컷

물건 2 · 러시아 세이블 코트

이반이 결혼 직후 사 준 모피 코트는 밍크가 아니라 러시아 세이블이다. 의상 담당은 실루엣에 고전적인 러시아 느낌을 넣고 싶었다고 했고, 그 선은 일흔 년대 일본 영화의 여자 죄수 캐릭터에서 따왔다고 밝혔다. 모피에 죄수의 선을 넣었다. 나는 이 선택이 좋다.

영화 초반 애니는 퇴근 전철에서 패딩을 입고 졸고 있다. 그 패딩에서 세이블까지가 애니의 상승 곡선이다. 그리고 저택에 세 남자가 들이닥쳐 애니를 묶고 입을 막고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가는 장면 뒤로, 애니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코트를 벗지 않는다. 밤새 브루클린을 끌려다니면서도 입고 있다. 코트가 애니에게 남은 유일한 증거다. 결혼이 있었다는 증거.

그 코트를 애니가 스스로 벗는 순간이 한 번 있다. 혼인 무효가 끝난 자리다. 벗어서 던진다. 이 영화에서 옷을 벗는 장면은 많다. 애니의 직업이 그렇다. 그런데 그 많은 장면 중에 코트를 벗는 이 한 번만 옷을 벗는 장면으로 보였다. 나머지는 일이었다. 이것만 결심이었다.

판정은 맞다. 다만 한 가지. 그 코트를 파카나 트렌치코트로 바꿨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껐을 것이다. 세이블이 아니면 벗는 장면이 성립하지 않는다. 가볍게 벗을 수 있는 옷은 벗어도 사건이 아니다.

물건 3 · 밀 베이슨의 저택

이반이 사는 집은 세트가 아니다. 브루클린 밀 베이슨에 실제로 있는 집이고, 실제 러시아 재벌이 소유했던 집이다. 감독은 브라이턴 비치에서 가장 큰 저택을 검색하다가 이 집을 찾았다고 했다. 대리석과 거울이 원래 있던 그대로이고, 미술팀은 집주인이 가진 조각과 그림을 빌려 놓는 정도로 손을 멈췄다고 한다.

이 집은 맞다. 너무 맞아서 세트처럼 보인다. 나는 보는 내내 이 집 어딘가가 가짜일 거라고 의심했고, 전부 진짜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영화에서 부자 집은 대개 미술팀이 생각하는 부자 집이다. 그래서 어딘가 균형이 잡혀 있다. 이 집은 균형이 없다. 진짜 돈은 균형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걸 영화가 안다.

애니가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 입은 옷은 몸에 붙는 파란 밴드 드레스다. 하얀 벽과 빨간 침대 시트 사이에 그 파랑이 들어온다. 의상 담당은 나중에 보니 영화 전체에 빨강과 파랑만 튀게 썼더라고 했다. 의도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나는 의도하지 않은 쪽을 믿는다. 의도한 상징은 대개 거슬린다.

그리고 이 집에 사는 이반은 틀렸다. 그 넓은 집에서 이반이 하는 일은 게임, 파티, 약, 도망이다. 집이 사람을 말해 준다면 이 집은 이반을 말해 주지 않는다. 이반의 부모를 말해 준다. 이반은 그 집에 손님이다. 손님이 손님을 데려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그 결혼은 집주인이 돌아오자 끝났다.

아노라 포스터

나는 상징으로 쓰인 소품이 싫다. 카메라가 물건 위에 삼 초 머물면서 이게 중요하다고 알려 주는 식 말이다. 이 영화는 그걸 안 한다. 농구 반바지도 세이블도 대리석도 그냥 거기 있다. 인물이 입고 걷고 던진다. 뜻은 보는 사람이 나중에 집에 가서 붙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그것이다.

애니가 마지막에 돌아가는 집은 기찻길 옆이다. 밀 베이슨에서 그 집까지가 이 영화의 거리다. 옷 한 벌이 올라갔다가 벗겨지는 거리이기도 하다.

반바지는 틀렸고 코트는 맞고 집은 진짜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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