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4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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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신데렐라 이야기를 백 번쯤 보신 분들께 여쭙는다. 왕자가 중간에 혼자 도망가는 판본을 보신 적이 있는지. 나는 이번에 처음 봤다. 그래서 이 글은 밥상 얘기가 되겠다. 다 차려진 밥상을 영화가 어디까지 받아먹고 어디서 상을 물렸는지.
먼저 예상 수순이다. 스트리퍼와 재벌 아들이 만나는 영화라면 이 순서로 가야 한다. 장르가 그렇게 정해 놓았다.
- 클럽에서 눈이 맞는다.
- 돈으로 시작한 관계가 어느 순간 진심이 된다.
- 즉흥 결혼. 가급적 라스베이거스.
- 시댁의 반대. 하수인이 파견된다.
- 왕자가 가족에 맞서 신부를 지킨다.
- 하수인 중 한 명이 신부에게 마음을 돌린다.
- 시어머니가 끝내 신부를 인정한다.
- 눈 내리는 밤, 재회와 입맞춤.
영화는 4번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받아먹는다. 브루클린 클럽에서 일하는 스물셋 애니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러시아 재벌 아들 이반의 담당이 된다. 이반은 일주일에 1만 5천 달러를 주고 여자친구 역할을 사고, 둘은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 즉흥으로 결혼하고, 큼직한 반지와 모피 코트를 산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아르메니아계 대부 토로스에게 전화를 넣고, 토로스는 부하 둘을 저택으로 보낸다. 여기까지는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모범 답안이다.
상이 물러지는 것은 5번이다. 부하 둘이 들이닥치자 왕자는 신부를 지키는 대신 혼자 집을 빠져나간다. 신부는 홀로 남아 물고 소리치고 손에 닿는 것을 부수며 저항하고, 결국 묶이고 입이 막히고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앗긴다. 이 침입 장면이 25분이다. 로맨스 영화라면 하수인이 들어와서 나가기까지 5분이면 족할 분량을 영화는 다섯 배로 늘린다. 그리고 이 25분이 영화에서 가장 웃긴 대목이라 하겠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웃게 되는 쪽의 웃음이다.
그다음은 수색이다. 신부와 하수인 셋이 한 차에 타고 열두 시간 동안 브루클린을 뒤진다. 사탕 가게, 식당, 또 식당. 토로스는 이 연락을 아기 세례식 한가운데서 받고 "안 돼"라고 말하며 뛰쳐나왔던 사람이다. 대부로서 체면이 있는데 신부와 함께 사탕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신랑을 찾아야 한다. 신랑은 어디에 있었는가. 신부가 일하던 그 클럽에, 신부의 동료 댄서와 함께 있었다. 신데렐라 판본 중에 왕자가 무도회장 뒷문으로 다시 들어가 다른 사람과 춤추는 판본은 없다. 이 영화에는 있다.
6번은 미묘하다. 하수인 중 한 명, 이고르는 분명 신부에게 마음을 돌린다. 수순대로다. 그런데 장르가 정해 놓은 다음 단계, 그러니까 하수인이 왕자를 대신해 신부와 이어지는 단계로는 가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는 그 사람에게 짐을 옮기게 하고 반지를 돌려주게 하고 입을 다물게 한다.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마지막 장면이니 세부는 적지 않겠다. 다만 눈은 온다. 입맞춤도 시도된다. 결과는 8번과 다르다는 것만 적어 둔다.
7번은 가장 깨끗하게 물려진다. 시어머니는 끝까지 신부를 창녀라 부르고, 서명하지 않으면 가족까지 망하게 하겠다고 협박한다. 신부는 서명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어머니에게, 당신 아들은 당신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돌아선다. 인정은 없다. 화해도 없다. 장르가 수십 년간 약속해 온 그 장면에 대해 영화는 일언반구 해명이 없다.
신랑의 마지막 인사도 적어 두어야겠다. "내 마지막 미국 여행을 재밌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이 대사를 듣고 2번이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돈으로 시작한 관계가 진심으로 바뀌는 장면이 어디 있었는지 되짚어 보았는데 없었다. 신부 쪽에만 있었다. 그러니 영화는 2번을 받아먹은 것이 아니라 받아먹은 척한 것이다. 이쪽은 상을 물린 게 아니라 상 위에 그릇만 놓고 음식은 안 담은 경우라 하겠다.
법원 대목도 구수하다. 신랑을 찾아 법원 앞에서 밤을 새우고 들어갔는데, 결혼을 네바다에서 했으니 뉴욕에서는 무효 소송을 받아 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일행은 전용기를 타고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간다. 결혼한 곳에 가서 결혼을 지우는 것이다. 왕복 비행기 값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그냥 둘이 살게 하는 쪽이 싸지 않았을까 싶지만, 재벌의 셈법은 내가 알 도리가 없다.
아무튼. 여덟 칸짜리 밥상에서 영화는 넷을 받고 하나를 받은 척하고 셋을 물렸다. 그런데 물린 셋이 전부 뒷부분이라 보는 사람은 앞 넷을 먹는 동안 아무 의심을 못 한다. 장르를 아는 분들이 더 세게 당하는 구조다. 신데렐라를 모르는 분들이 오히려 덤덤하게 보실 것이다.
그래서 추천하느냐 물으신다면, 밥상이 물려지는 순간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그렇다. 제대로 차려진 상을 드시고 싶은 분들께는 다른 영화가 많다. 다만 한 가지. 왕자가 도망간 뒤에 남은 사람이 누구인지 끝까지 보고 나오시기 바란다. 이 영화는 왕자 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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