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3학년 2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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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한 곳에 멈춘 공
마트 주차장에 카트를 세워 두고 돌아보면 카트는 늘 같은 자리에 가 있다. 내가 둔 자리가 아니다. 바닥이 조금 낮은 곳, 배수구 근처다. 아무도 밀지 않았는데 거기로 간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그 카트를 생각했다.
움푹한 곳에 멈춘 공
공을 그릇에 넣으면 공은 바닥 한가운데에 가서 멈춘다. 이걸 두고 공이 바닥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공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방향으로 조금 움직여도 올라가야 하는 자리에 오면 더 갈 곳이 없어서 멈춘다. 멈춘 공을 다시 움직이려면 누가 밀어 줘야 한다. 얼마나 세게 밀어야 하느냐는 그릇이 얼마나 깊은가에 달려 있다.
일상에 이런 것이 셋 있다. 주차장의 카트. 비 온 뒤 보도블록 틈에 모이는 물. 소파 쿠션 사이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 리모컨. 셋 다 누가 보내서 간 것이 아니다. 주변보다 조금 낮은 자리가 있었고, 거기 닿자 더 움직일 이유가 없어졌을 뿐이다.
이 자리에 이름을 붙이면 「안정한 자리」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여야 한다. 그릇 바닥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은 아니다. 그릇 바깥에는 바닥이 더 낮은 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공은 그걸 모른다. 알 방법이 없다. 그릇 벽을 넘어가 보지 않는 한, 지금 멈춘 자리가 전부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따로 「가까운 데서 가장 낮은 자리」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공이 어디서 멈추느냐가 공의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닥의 모양과 공이 처음에 받은 힘이 정한다. 같은 공이라도 세게 던지면 그릇을 넘어가고, 살짝 놓으면 바닥에 남는다. 공을 탓할 일은 아니다.
창우가 멈춘 자리
영화는 쇠를 깎는 기계를 가까이 찍은 컷으로 시작한다. 그 앞에 열아홉 살 창우가 있다. 직업계고 3학년 2학기, 학교 대신 남동공단의 작은 공장으로 현장실습을 나온 참이다. 처음 지원한 중견기업에서는 떨어졌고, 담임이 권한 중소기업이 여기다. 취업이 되면 대학 진학과 병역특례가 따라온다는 말을 듣고 왔다.
창우는 계약서를 쓰기 전에 묻는다. 저를 좋게 봐줄까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보다 남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다. 같이 온 우재는 반대다. 취직이 안 되면 해병대에 가면 된다고 말한다. 공장에는 에이스로 불리는 성민이 있고, 총무과에는 다혜가 있다. 같은 그릇에 들어온 공 넷이다.
그릇의 모양을 보자. 사수 송대리는 후배들이 이 공장에 들어올 수 있을지가 너희 손에 달렸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누른다. 2층에는 안전장치가 없다. 그라인더는 스위치를 꺼도 바로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사장은 사장실에서 갈변한 사과를 먹는다. 공장 주변에는 PC방도 카페도 없고, 아이들의 아침은 맥도날드 메뉴다. 좋은 그릇은 아니다. 그렇다고 깨진 그릇도 아니다. 영화에는 물리칠 악당이 없다. 어른들은 각자의 한계 안에서 피로하다.
그릇의 바닥이 단단한지도 한 번은 시험된다. 영화 후반에 결국 사고가 난다. 누군가 다친다. 공은 바닥이 꺼지는지 아닌지 미리 알 수 없고, 창우와 친구들도 그랬다. 그 뒤에 아이들은 자기 발밑을 한 번 내려다본다. 바닥이 바뀌지는 않는다. 바닥을 보는 눈이 바뀐다.
그릇에서 나간 공이 둘이다. 우재는 며칠 일하다 그만두고 아버지의 편의점에서 일한다. 성민은 에이스였지만 부당함을 참지 못하고 공장을 떠나 배달 일을 한다. 둘에게는 밀어 줄 힘이 있었다. 우재에게는 아버지의 편의점이 있었고, 성민에게는 감독이 인터뷰에서 「용기」라고 부른 것이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릇 벽을 넘을 만큼의 힘이다.
창우는 남는다. 감독은 창우를 두고 특별한 재능도, 스펙도, 지원해 줄 집안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고, 창우의 핵심 대사로 「이거 아니면 뭐 할 건데?」를 꼽았다. 이 대사는 그릇 안에서 하는 말이다. 벽 바깥에 더 낮은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창우는 모른다. 알 방법이 없다. 어림잡아 창우가 받은 힘은 우재의 편의점 하나만큼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까운 데서 가장 낮은 자리에 멈춘다. 영화는 창우가 노동자로 정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끝난다. 정착. 공이 멈추는 일을 부르는 말과 같다.
여기까지는 개념이 잘 맞는다. 그런데 맞지 않는 데가 있고, 거기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은 멈춘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창우는 한다. 첫 실습비를 받아 막내가 바라던 브랜드 치킨과 둘째의 무선 이어폰을 사고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탠다. 파스를 붙이고 다음 날 또 나간다. 용접에 관심이 생긴다. 쉬는 시간에는 기타로 서툴게 「울게 하소서」를 친다. 처음에는 서툴던 장비 다루기가 끝에 가면 한 사람 몫이 된다. 공은 바닥에 닿은 뒤 자기가 닿은 바닥을 바꾸지 못한다. 창우는 바꾼다. 아주 조금씩, 자기 몸이 그 바닥에 맞게 깎여 가는 방식으로. 이걸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공에는 없는 일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노동영화보다 성장영화로 읽어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이상했다. 공이 바닥에 멈추는 일을 성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데 공은 멈춘 뒤에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창우는 멈춘 뒤에 기계를 배운다. 성장이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는 거기밖에 없다.
또 하나. 공이 멈추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바닥이 낮았을 뿐이다. 창우가 남은 데에도 세상이 붙여 준 이유는 없다. 학교 현수막에는 「당신은 우리의 희망입니다」라고 적혀 있지만 그 글자는 공장까지 따라오지 않는다. 그런데 창우는 거기서 긍지를 가지려고 한다. 감독은 창우를 그런 와중에도 긍지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우주에는 의미가 없다. 공이 멈춘 자리에는 더더욱 없다. 그 자리에서 의미를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는 매번 놀랍다.
내가 틀렸을 수 있다. 창우가 멈춘 자리가 가까운 데서 가장 낮은 자리가 아니라, 창우가 고른 자리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걸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가르쳐 주지 않는 쪽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차장 카트는 아직도 배수구 옆에 가 있다. 그 카트는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창우는 거기서 쇠를 깎는다. 그 차이가 이 영화 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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