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나의 사적인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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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그 시집을 펼친 분께
이분께 먼저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헌책방 선반에서 그 얇은 시집을 집어 들었을 때의 마음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짜였을 거예요.
이 영화에는 마이어스라는 청년이 나옵니다. 뉴욕의 젊은 예술가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고, 모임 이름은 '열의의 사회'예요. 이분은 오래전에 나왔다가 조용히 절판된 시집 한 권을 헌책방에서 발견합니다. 그러고는 그 시를 쓴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아내요. 우체국에서 수십 년째 편지를 분류해 온 에드 색스버거라는 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이어스를 남을 이용한 사람으로 보실 거예요. 그런데요,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이분의 행동을 한번 볼게요. 먼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옛날 시집을 끝까지 읽었어요. 그리고 그 시를 쓴 사람의 주소를 수소문해서, 남의 집 문 앞까지 찾아갔습니다. 문이 열리자 자기는 당신 시의 독자라고 말했어요. 이건 품이 굉장히 많이 드는 일입니다. 시키는 사람도 없고, 당장 돌아오는 것도 없는 일이에요.

그다음에 한 일도 보통 품이 아니에요. 이분은 에드를 모임에 데려가고, 그 자리에서 이 사람이 오래 저평가된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낭독회를 열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이분이에요. 날짜를 잡고, 전단을 만들고, 출판 쪽에 닿아 있는 친척에게 자리를 부탁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이만큼 움직여 본 적 있는 분은 아실 거예요. 이건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중간에 그만두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분의 마음이 처음부터 가짜였다고 저는 말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이분은 해야 할 일 하나를 끝내 하지 않습니다. 그 시집을 모임 사람들에게 넘기지 않아요. 빌려주지도 않고, 소리 내어 읽어 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모임 사람들은 에드를 '잊힌 천재'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그 시는 한 줄도 모른 채로 몇 달을 보냅니다. 그 시집을 읽은 사람은 끝까지 마이어스 한 사람뿐이에요. 저는 이 대목이 이분을 가장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한 사람이, 손만 뻗으면 되는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
왜 안 넘겼을까요. 아마 나누기가 싫었을 거예요. 영화는 이분의 지난날을 보여 주지 않지만, 모임 안에서 이분이 가진 것들을 가만히 보면 짐작되는 게 있습니다. 넓은 집도, 값이 적힌 비싼 책들도, 출판 쪽에 닿아 있는 친척도 다 물려받은 것이에요. 그 시집만은 달랐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선반에서 이분이 혼자 찾아낸 것이었으니까요. 먼저 알아본 사람이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쉽게 흔들립니다. 다른 누가 먼저 읽어 버리면 그 자리가 사라지거든요. 이건 이분이 이상해서가 아니에요. 제 힘으로 가진 게 하나뿐일 때, 사람은 그 하나를 꽉 쥡니다.
장면 하나를 같이 볼게요. 이분은 에드를 부를 때 꼭 '색스버거'라고 합니다.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부르는 거예요. 모임 사람들도 따라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낭독회 전날, 에드가 새 시를 끝내 쓰지 못했다고 털어놓자 이분은 처음으로 '에드'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호칭이 바뀌는 순간이 참 아팠어요. 그동안 성으로 불렀다는 건, 이분이 보고 있던 것이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해낸 '발견'이었다는 뜻이니까요. 쓸모가 흔들리자 그제야 사람 이름이 나온 겁니다.
낭독회는 결국 치러지고, 에드는 새 시 대신 사십 년 전의 시를 읽습니다. 그리고 그 글은 혹평을 받아요. 그 뒤가 저는 더 마음에 걸렸습니다. 모임 사람들이 서로를 탓하기 시작하거든요. 누가 데려왔느냐는 말이 오가는 자리에서 이분이 들은 것은 결국 비난이었습니다. 아마 이분이 듣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을 거예요. "네가 먼저 알아본 건 맞아." 저는 이 한마디였을 것 같습니다. 들은 말에는 '결과'만 있고 '사람'이 없어요.

이분이 끝까지 하지 못한 말도 있어요. 당신 시의 어느 구절이 나를 흔들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꺼내는 대신 이분은 일을 벌입니다. 모임에 데려가고, 낭독회를 잡고, 전단을 만들고, 출판 쪽 사람을 소개해요. 마음을 말로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주 일로 마음을 대신합니다. 그게 더 안전하거든요. 말은 거절당하면 내가 다치지만, 일은 틀어져도 일을 탓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에드가 정말 듣고 싶었던 건 전단이 아니라 그 한마디였을 거예요. 그리고 그 말을 아낀 탓에, 두 사람은 몇 달을 함께 다니고도 서로를 거의 알지 못한 채 헤어집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가야겠습니다. 이분이 출판 이야기를 하며 데려간 자리는 사실 인플루언서를 다루는 회사였어요. 낭독회 전단을 건네고 에드를 배웅한 뒤에는, 문이 닫히자마자 집 안의 음성 비서에게 음악 소리를 높여 달라고 합니다. 기술과 요즘 세상을 그렇게 흉보던 사람이 말이에요. 저는 그 짧은 동작에 이분의 온도가 다 들어 있다고 봤습니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 행동이 괜찮아지는 건 아닙니다. 조용히 살던 분을 몇 달 동안 들었다 놓은 일은, 설명이 되더라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아요.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중요해요. 열기가 다 식고 난 뒤에 에드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와 연필을 다시 꺼냅니다. 모임도 없고, 전단도 없고, 성으로 불러 주는 사람도 없는 자리에서요. 마이어스가 끝내 주지 못한 것을 그분은 혼자 되찾은 겁니다. 저는 이게 마이어스께도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피운 열기가 식는 걸 끝까지 지켜본 사람만이, 다음에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스물몇 살에 그걸 한 번 겪은 건 늦은 게 아닙니다.
혹시 주변에 이런 분이 계신가요. 누군가를 아주 열렬히 띄워 주다가 어느 날 조용히 식어 버리는 사람이요. 그런 분을 보면 보통은 변덕스럽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은 그 사람을 더 입 다물게 만들어요. 다음에는 이렇게 한번 물어봐 주세요.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지, 그건 아직 궁금해."
띄운 이유를 캐물으면 변명이 나오지만, 좋았던 데를 물으면 그 사람의 진짜가 나옵니다. 마이어스에게도 그걸 물어 준 사람이 한 명쯤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헌책방에서 시집을 집어 든 손은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그 손이 거짓이었던 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정말 좋아했던 것을 한 번 정확히 말해 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조금 다르게 좋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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