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5

나는 크리스찬 래트너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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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를 스피커 앞에 두면

막판뒤집기· 2026. 10. 26.· 2,907자

2.1초. 1992년 3월, 미국 대학 농구 토너먼트 동부 지역 결승에서 듀크가 한 점 뒤진 채 남아 있던 시간이다. 상대 코트 끝에서 날아온 긴 패스를 받은 크리스찬 래트너는 그 2.1초 가운데 1초 가까이를 드리블 한 번에 쓴 뒤 돌아서서 던졌고, 공은 들어갔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 장면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바로 그 1초에서 「저 여유가 재수 없다」는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준다.

「나는 크리스찬 래트너가 싫어」는 2015년 3월에 방송된 77분짜리 스포츠 다큐멘터리다. 대학 농구 역사에서 손꼽히는 성적을 낸 선수가 왜 그렇게 오래, 그렇게 널리 미움받았는가를 묻는다. 영화는 이유를 다섯 갈래로 나눈다. 특권, 인종, 괴롭힘, 위대함, 외모. 어느 평은 이 다섯 갈래를 쇠스랑에 비유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농구가 아니라 다른 것을 생각했다. 되먹임이다. 틀릴 수 있는 생각이지만, 끝까지 가 보려 한다.

되먹임이란

되먹임은 어떤 결과가 다시 원인 쪽으로 돌아가 다음 결과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일상에서 셋만 들어 보자. 첫째, 마이크를 스피커 앞에 두면 나는 소리. 마이크가 받은 소리가 스피커로 나오고, 그 소리가 다시 마이크로 들어가 더 커진다. 몇 바퀴 돌면 귀를 찢는 하울링이 된다. 둘째, 은행 앞의 줄. 은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돈을 빼러 가면, 그 줄을 본 사람들이 더 불안해져 줄이 길어진다. 소문이 사실이었든 아니든 결과는 같다. 셋째, 집의 온도 조절기. 방이 더워지면 냉방이 돌고, 식으면 멈춘다. 이것도 되먹임인데 방향이 반대다. 앞의 둘은 결과가 원인을 키우고, 이것은 결과가 원인을 줄인다.

앞의 것을 양의 되먹임, 뒤의 것을 음의 되먹임이라 부른다. 세상이 하울링으로 가득 차지 않는 것은 음의 되먹임이 어디에나 있어서다. 그러니 어떤 것이 멈추지 않고 커진다면, 그것을 줄이는 쪽 고리가 어딘가 끊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이 영화에 대 보면

영화가 보여 주는 래트너의 경기 장면에는 되풀이되는 순서가 있다. 팔꿈치가 나간다. 상대가 참지 못하고 되갚는다. 심판의 휘슬은 되갚은 쪽을 향한다. 래트너는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 네 박자가 여러 경기에서 반복된다. 상대의 분노가 그에게 이득으로 돌아오고, 그 이득이 다음 팔꿈치를 부른다. 마이크와 스피커다.

같은 팀 안에서도 그랬다. 영화에서 래트너는 팀의 작은 가드였던 동료에 관해 말한다. 그 친구는 건드리면 금방 발끈했고, 그걸 알고 나서는 「감염」처럼 자꾸 하고 싶어졌다고. 상대의 반응이 다음 행동의 연료가 된다는 고백이다. 되먹임의 고리가 한 사람의 성격 안에서 돌기 시작해 코트 전체로 번진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내 풀이고, 영화는 그 말을 그렇게 이어 붙이지 않는다.

나는 크리스찬 래트너가 싫어 스틸컷

맞지 않는 곳

그런데 되먹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두 가지다.

하나. 되먹임은 들어오는 신호가 있어야 돈다. 그런데 다섯 갈래 중 「특권」은 신호 자체가 틀렸다. 영화는 그가 부유한 사립학교 출신이라는 인식에 맞서, 어머니가 교사이고 아버지가 신문사에서 일한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으며, 사립학교는 장학금으로 다니면서 여름에는 학교 청소를 했다고 밝힌다. 그러니까 이 갈래의 미움은 없는 소리를 마이크가 받아서 키운 셈이다. 하울링은 적어도 처음에 작은 소리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그것조차 없었다. 은행 앞 줄의 비유가 더 가깝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줄의 길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둘. 되먹임은 입력이 끊기면 사그라들어야 한다. 마이크를 치우면 하울링은 멈춘다. 그런데 래트너가 대학 코트를 떠난 뒤 20년이 넘게 지난 2015년에도 켄터키의 팬들은 여전히 그를 싫어했고, 그래서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입력은 없었다. 그런데도 미움은 식지 않았다. 되먹임만으로는 여기까지 못 간다. 사람에게는 기억이 있고, 기억은 입력 없이도 신호를 다시 만들어 낸다. 영화가 프로레슬링의 유명한 악역 선수를 인터뷰해 선과 악의 이야기가 왜 필요한지를 묻는 대목은 그래서 들어간 것 같다. 사람은 고리를 돌리는 기계가 아니라, 고리에 이야기를 붙이는 동물이다.

영화가 인종 문제를 꺼내 놓고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평이 여럿 있었고, 나도 그 아쉬움에 동의한다. 다만 이 글의 틀 안에서 말하면, 그 갈래야말로 되먹임보다 큰 것이 있다는 증거다. 그가 코트에서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돌고 있던 신호가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스찬 래트너가 싫어 포스터

결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경기장이 아니다. 래트너가 자기 집 뒷마당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그 슛을 다시 해 본다. 17피트, 어림잡아 5미터 거리에서 돌아서서 던지는 그 슛이다. 공은 들어간다. 첫 번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나는 이 장면이 되먹임의 고리가 끊어진 자리라고 읽었다. 거기에는 밀치는 상대도, 되갚을 팔꿈치도, 야유하는 관중도 없다. 마이크와 스피커가 멀리 떨어져 있다. 남은 것은 공이 들어갔다는 사실 하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아이 하나다. 영화의 소개문은 「때로 인식은 실제가 아니다」라는 말로 자기 요지를 정리하는데, 그 말에 꼭 맞는 그림이다. 미움받던 사람이 미움 없는 곳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동작은 같고 소리만 없다.

우주에는 의미가 없다. 공이 림을 지나는 데 2.1초가 걸렸는지, 그중 1초를 드리블에 썼는지는 중력이 알 바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1초에서 거만함을 읽고, 20년 넘게 그 1초를 미워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1초에서 평생의 자부심을 읽는다. 아무 뜻 없는 1초에 그렇게 많은 뜻을 보는 것. 나는 그것이 놀랍고, 조금은 무섭다.

덧붙이는 말. 이 영화가 방송된 날 밤, 래트너는 자기 계정으로 영화를 보며 글을 올렸고, 23년 전 그 켄터키 경기에서 자기가 가슴을 밟았던 선수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상대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고 답했다. 영화 밖에서 고리 하나가 더 끊어졌다. 이것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적어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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