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5
나는 크리스찬 래트너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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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다 했다, 그게 문제다
제목이 다 했다. 「나는 크리스찬 래트너가 싫어」. 이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사람은 없다. 싫어하는 사람은 제 편인 줄 알고 누른다. 좋아하는 사람은 변호하러 누른다. 나는 제목이 일을 다 한 영화를 경계한다. 안이 비어 있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2015년 3월에 방송된 77분짜리 스포츠 다큐멘터리다. 1990년대 초 미국 대학 농구에서 네 해 연속 4강에 오르고 두 번 우승한 선수가 왜 그 시절 가장 미움받은 선수가 되었는지를 묻는다. 영화는 이유를 다섯 갈래로 나눈다. 특권, 인종, 괴롭힘, 위대함, 외모. 이 영화는 호불호가 갈린다. 좋아하는 쪽과 싫어하는 쪽의 논리를 셋씩 적는다. 둘 다 실제로 나온 리뷰들에서 본 것을 내 말로 옮긴 것이다.
좋아하는 쪽
- 주인공이 변명하지 않는다. 래트너는 긴 시간 카메라 앞에 앉는다. 어릴 때 형이 자기를 괴롭혔고 자기는 그걸 친구와 상대에게 그대로 넘겼다고 말한다. 팀 동료를 괴롭힌 것도 인정한다. 그런데 자기가 경기한 방식을 사과하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쪽은 이 태도를 영화의 척추로 본다. 변명하는 악당은 지루하다. 인정하고 사과 안 하는 악당은 끝까지 보게 된다. 한 평은 그를 자기 자신과 완전히 편해진 사람처럼 보인다고 썼다.
- 시간 순서를 버린 것이 맞았다. 영화는 데뷔부터 은퇴까지 가지 않는다. 다섯 갈래마다 경력을 흩어 놓고, 보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순서를 다시 맞추게 한다. 그 사이로 1990년대 대학 농구 영상이 쉴 새 없이 지나간다. 켄터키 팬 한 사람이 집에서 찍은 비디오가 대표적이다. 환호하던 얼굴이 몇 초 만에 무너진다. 좋아하는 쪽은 77분이 늘어지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당시 팀의 코치였던 해설자는 그의 대학 경력을 역대 최고의 대학 선수 몇 명과 같은 줄에 놓는데, 그 말이 허풍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영상이 받쳐 준다.
- 증거를 하나 더 보여 준다. 1992년 켄터키와의 경기에서 그가 바닥에 누운 상대 선수의 가슴을 밟은 장면은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제1 증거다. 영화는 그 앞 장면을 붙인다. 켄터키의 다른 선수가 그를 코트 밖으로 밀어 넘어뜨리는 장면이다. 래트너는 밟은 선수가 자기를 밀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잘못 짚었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쪽은 이것을 변호가 아니라 입체화라고 부른다. 밟은 건 밟은 거다. 그런데 앞뒤가 붙으면 그림이 달라진다.
싫어하는 쪽
- 귀여운 척이 과하다. 괴롭힘을 설명하면서 유명 래퍼의 사진을 띄우고, 1990년대 백인들이 흑인 문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말하면서 백인 래퍼의 사진을 띄운다. 내레이션은 영화배우가 맡았다. 한 평은 이 영화가 대학 농구 최고의 악역을 다루면서 너무 자주 귀여운 쪽으로 도망친다고 썼다. 나도 그 사진들이 나올 때 눈을 돌렸다. 미움을 다루는 영화가 미움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
- 인종 이야기를 꺼내 놓고 도망친다. 상대 팀의 흑인 선수들이 그와 맞붙기 전부터 그의 실력을 의심했다고 고백한다. 한 학자는 그가 흑인 선수들의 공격적인 몸짓을 백인의 몸으로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영화는 거기서 멈춘다. 여러 평이 같은 자리를 짚었다. 가장 뜨거운 갈래를 가장 짧게 지나갔다는 것이다. 다섯 갈래 중 하나가 비면 나머지 넷도 흔들린다.
- 새로운 말이 없다. 한 시청자는 이미 아는 것 말고 배운 게 없고, 인터뷰가 뻔한 소리와 짧은 한마디로 채워져 있다고 썼다. 다른 평은 이 영화가 왜 우리가 선수를 미워하는지는 묻지만, 왜 우리가 애초에 스포츠에 이렇게 매달리는지는 묻지 않는다고 했다. 괴롭혀서 더 나은 선수로 만든다는 논리가 지금 보면 낡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나는 어느 쪽인가
나는 싫다고 해 놓고 좋아하게 만드는 영화가 싫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제목은 미움을 팔고, 77분 뒤에 남는 것은 호감이다. 보고 나서 그를 더 싫어하게 됐다는 사람을 나는 아직 못 봤다. 그 점에서 제목은 낚시다. 그런데 이 낚시는 자기가 낚시인 걸 숨기지 않는다. 감독은 촬영 전에 래트너에게 이 영화가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공정할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움을 상품으로 포장해 다시 파는 일을 영화가 대놓고 한다. 나는 그 뻔뻔함은 인정한다.
판정은 이렇다. 싫어하는 쪽의 두 번째 논리에 나는 거의 전부 동의한다. 인종 갈래를 그렇게 지나간 것은 겁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를 보는 쪽에 선다. 좋아하는 쪽의 세 번째 때문이다. 밟은 장면 앞에 밀친 장면을 붙이는 일. 그것 하나만 해도 이 영화는 자기 몫을 했다. 미움은 한 장면으로 만들어지고, 한 장면을 더 보는 것으로 흔들린다. 지루한 구간이 있다. 좋은 영화다. 모순이 아니다.
양쪽 다 아닌 사람에게 한 줄. 농구를 몰라도 된다. 한 사람을 20년 넘게 미워하는 데 사람들이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이는지 궁금하면, 77분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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