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풍림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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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없는 것은 줄거리가 아니다
일곱 시간. 「풍림화산」의 첫 편집본 길이로 보도된 숫자다. 극장에 걸린 판은 125분이고, 칸에서 처음 상영된 판은 그보다 몇 분 길었다. 2017년 여름에 찍기 시작해 2018년 봄에 촬영을 마친 영화가 2025년 5월에야 세상에 나왔고, 한국에는 2026년 2월에 들어왔다. 4억 홍콩달러가 들어 홍콩 영화 역사에서 가장 비싼 영화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보도도 있다. 숫자가 많은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말도 대개 숫자로 끝난다. 일곱 시간을 두 시간으로 줄였으니 이야기가 남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통념
통념을 먼저 성실하게 적는다. 칸 상영 직후 나온 영어권 평은 대체로 한 방향이었다. 어느 매체는 이 영화가 암호와 혼란 사이의 선을 넘었다고 했고, 미니시리즈였으면 훌륭했을 거라고 덧붙였다. 다른 매체는 규모는 호화로운데 놀랍도록 비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평자는 아무도 본 적 없는 어떤 시리즈의 두 번째 시즌 중간 세 회를 보는 것 같다고 썼다. 프랑스 쪽 평은 인물이 너무 많아 각자 영화 한 편씩은 가질 만한 사람들이 한 편에 구겨 넣어졌다고 했다. 한국에서 개봉한 뒤 커뮤니티에 올라온 긴 글도 같은 자리에 있다. 감정이 쌓이려는 순간마다 장면이 바뀌고, 인물 관계가 윤곽을 잡을 때쯤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평점 사이트의 짧은 글들은 더 짧게 말한다. 생략이 많다.
요약하면 이렇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잘려 나갔다. 그래서 남은 것은 눈 내리는 홍콩과 네온과 잘생긴 얼굴들뿐이다. 132분, 180분, 360분짜리 판이 따로 있다는 말이 돌고, 감독은 이 영화를 서장이라 불렀다. 통념은 그 말을 증거로 삼는다. 완전한 판이 어딘가에 있다면 지금 판은 불완전한 판이다.
나는 이 통념의 전제를 먼저 적어 두고 싶다. 영화에 있어야 할 것은 사건의 인과라는 전제다. 누가 왜 쐈는지, 누가 누구를 배신했는지, 그 폭탄은 누가 왜 터뜨렸는지. 이것이 설명되면 이야기가 있는 것이고, 설명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통념은 이 전제를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본 것
나는 다르게 보았다. 이 영화는 사건의 인과를 설명하는 데 인색하다. 그 점은 통념이 옳다. 눈 덮인 번화가에서 복면을 쓴 자들이 행인을 무차별로 쏘는데 누가 보냈는지 끝까지 말해 주지 않는다. 세 시간 뒤 한 남자가 병원을 폭파하고 그 안에 있던 제약 그룹 회장이 죽는데, 그 남자가 왜 그랬는지도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영화가 다른 한 가지는 집요하게 설명한다. 인물마다 가족이 어떤 상태인지다.
세어 보면 이렇다. 마약수사과의 비리 경찰에게는 천식을 앓는 여섯 살 딸이 있고, 그는 그 아이를 데리고 이민 갈 돈을 모으느라 정보를 팔고 물건을 돌린다. 경찰에 심리 전문가로 다시 불려 온 전직 경찰은 십 년 전 임신한 아내를 잃었다. 「청소부」라 불리는 킬러는 자기 입으로 부모도 처자도 없다고 말한다. 조직의 원로인 뱀 아저씨는 죽기 직전에 자기 목숨이 아니라 자식 있는 동생의 목숨을 빌어 달라고 한다. 젊은 여자 킬러는 자기 팀을 가족이라 부른다. 회장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것을 어떻게 할지를 두고 갈라진다. 사건은 설명하지 않는 영화가 가족 사정만은 인물마다 대사나 독백으로 빠짐없이 적어 둔다. 이것은 편집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일곱 시간을 두 시간으로 줄이면서도 남겨 둔 것이라면, 그것이 영화가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면 둘을 든다. 하나는 전화다. 신분을 여러 번 바꿔 살아온 언더커버 경찰이 비리 경찰에게 아들 백일잔치에 와 달라고 한다. 상대는 화를 내며 끊는다. 그건 이제 네가 아니다, 그 신분은 취소됐다. 이 대화에는 사건이 하나도 없다. 누가 누구를 쫓는지, 어느 조직이 어느 조직을 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무엇을 두고 사람을 가르는지는 다 보인다. 아이가 있다고 믿는 사람과 그 믿음을 취소하는 사람. 이 통화를 한 남자가 병원을 폭파한다. 영화는 이유를 말하지 않지만, 이유가 없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도망자 신분이던 장남 리원디가 아버지 장례에 참석하려고 48시간 귀환 허가를 받아 돌아오고, 두 형제가 영정 앞에서 마주 선다. 동생 리우퉁은 마약 공급을 무기한 끊고 조직을 씻어 내려는 쪽이고, 형은 계속 팔겠다는 쪽이다. 동생이 형에게 하는 말이 있다. 가장 돈이 되는 약은 병원에서 처방하는 서양 약이고, 그 약을 파는 사람은 의사라고. 형은 듣지 않는다. 결국 형은 총에 맞아 죽고 동생은 중상을 입어 병원에 오래 누워 있게 된다. 이 장면에서도 사건의 인과는 흐릿하다. 누가 누구 편인지 그 자리에 선 사람들의 관계를 다 따라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사람이 무엇을 두고 갈라섰는지는 분명하다. 물려받은 것을 씻을 것인가, 그대로 이을 것인가. 이 영화에서 이보다 분명하게 말해지는 것은 없다.
그러니 이 영화에 없는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설명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버지가 죽고, 두 아들이 유산을 두고 갈라지고, 둘 다 좋은 끝을 보지 못한다. 그 사이의 모든 인물이 각자 집에 누가 있고 없는지를 말한다. 설명이 빠진 자리에 통념은 「이야기가 없다」를 써 넣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 「이야기가 하나뿐이다」를 써 넣고 싶다. 이야기가 없는 영화와 이야기가 하나뿐인 영화는 다르다. 앞의 것은 보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뒤의 것은 보고 나면 그 하나가 자꾸 돌아온다.
영화가 끝난 뒤에 한 번 더 돌아가는 대목이 그 증거다. 초반에 나온 전화 통화를 다시 보여 준 뒤, 카메라는 한 술집으로 들어가 거의 끊지 않고 사람들을 지나간다. 비리 경찰이 전직 경찰과 옛이야기를 나누고, 킬러는 다음 일을 준비하고, 리우퉁의 연인이 그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면서 아이를 지울까 한다고 덧붙인다. 서로 모르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어느 평자는 이 수법이 십 년 전 홍콩 영화의 한 장면을 서툴게 흉내 낸 것이라 했다. 그럴 수 있다. 다만 나는 이 장면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적어 둔다. 여기서 밝혀지는 것은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가 아니라 누가 아이를 가졌는지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같은 것만 묻는다.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넘기는가.
내 해석도 틀릴 수 있는 지점은 분명하다. 일곱 시간짜리 판에는 내가 「설명하지 않는다」고 쓴 것들이 다 들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설명을 거부한 영화가 아니라 설명이 잘려 나간 영화이고, 가족 사정만 남은 것은 의도가 아니라 우연이 된다. 나는 그 판을 보지 못했으므로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볼 수 있는 두 시간만 두고 말하면, 비어 있다는 말은 맞지 않다. 비어 있는 자리마다 누군가의 집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 집들은 하나같이 누가 빠져 있다. 아내가 없거나, 아이가 없거나, 아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취소된다. 그런 사람들이 물려받은 도시에서 무엇을 다음 사람에게 넘길 수 있는가. 영화는 답하지 않았고, 나도 답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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