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5
풍림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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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두 번 졸았고 나는 구구단을 들었다
친구가 먼저 봤다. 전화를 걸어 와서 첫마디가 「두 번 졸았다」였다. 나도 봤다고 하자 바로 싸움이 났다. 「풍림화산」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1994년의 홍콩에 눈이 내리는 영화다. 핵겨울이라는 설정이고, 눈 덮인 번화가에서 복면 쓴 자들이 행인을 쏘고, 세 시간 뒤 병원이 폭파되어 경찰 보호 아래 입원해 있던 제약 그룹 회장이 죽는다. 그 뒤로 두 아들과 비리 경찰과 킬러들이 얽히는 홍콩 누아르다. 2025년 봄 칸에서 처음 상영됐고 한국에는 2026년 2월에 들어왔다. 125분. 아래는 그날 통화를 기억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영화에 관한 사실은 뒤에 기사와 평을 열어 확인했고, 친구의 말은 친구가 책임질 일이라 하겠다.
친구 첫 장면부터 말하자. 눈 오는 번화가에 마대 자루 뒤집어쓴 놈들이 기관총을 갈기는데, 쓰러지는 행인이 전부 검은 옷이더라. 흰 눈에 검은 옷. 그림 찍으려고 사람 죽인 거다.
나 그림이 좋긴 했다.
친구 그게 문제라는 거다. 홍콩 누아르에 총격전이 있어야 한다는 건 안다. 그런데 누가 보냈는지 끝까지 안 나온다.
나 그 총잡이가 구구단을 외면서 쏘는 건 들으셨는가.
친구 들었다. 그게 뭐.
나 마약수사과 형사가 마지막 남은 총잡이를 옛날식 찻집 안까지 쫓아가서 죽이는데, 그때 그 사람 구구단이 팔단 어디쯤에서 끊긴다.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모르는 채로 그 숫자가 귀에 남았다. 누가 보냈는지 아는 것보다 그 숫자가 오래 갔다.
친구 그건 네가 뭐든 의미를 찾는 병이다. 그리고 그 눈. 눈이 그렇게 오는데 다들 평소 홍콩 겨울 옷차림이다. 춥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나 핵겨울이면 보통 추위가 아닐 텐데, 그 점에 대해 영화는 일언반구 해명이 없다. 그건 인정한다.
친구 1994년인데 손에 든 전화기도 이상하더라.
나 그 세계의 1994년이 우리 1994년과 같아야 한다는 조례는 없다. 다만 활 들고 나타나는 분은 나도 좀 놀랐다.
친구 활!
나 물건 뺏으러 온 패거리에 활잡이가 끼어 있다. 오래된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을 위해서였다는 평도 있다. 홍콩 누아르의 수순을 적어 보면 이렇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 둘이 갈라지고, 비리 경찰에게 어린 딸이 있고, 킬러는 자기한테 가족이 없다고 말하고, 전당포에 총 손보는 노인이 있고, 언더커버가 있다. 활은 없다.
친구 수순을 다 알면서 왜 좋다고 하나.
나 수순을 다 따랐다고 좋다는 게 아니다. 전당포 장면 보셨는가. 총 손보는 할머니가 방아쇠 스프링에 한 파운드 반을 더 얹는다. 옛 홍콩 총격 영화에 나온 대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 하더라.
친구 그러니까 베꼈다는 거잖아.
나 베꼈다. 그런데 그걸 할머니가 하신다. 홍콩 누아르 수순에 총 손보는 사람은 있어도 할머니는 없었다. 수순에 있는 것을 수순에 없는 사람이 하면 그건 구수한 거다.
친구 구수하다는 말로 다 넘어가려 하지 마라. 그럼 그 수프 장면은 뭐냐. 오래 알던 남자 둘이 앉아서 샥스핀 수프를 먹고, 한 사람이 주방장한테 솔직히 말해 보라 하고, 주방장이 「늘 너무 짰다」고 하고 끝. 어디로도 안 간다.
나 거기가 내 최고 장면이다.
친구 당연히 그렇겠지.
나 이 영화는 폭파도 총격도 큰 소리로 한다. 그 장면만 작은 소리로 한다. 짰다는 말 하나로 두 사람 사이에 몇 년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 어디로도 안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어디를 다녀온 사람들이다.
친구 그 몇 년을 보여 줬으면 됐잖아. 일곱 시간 찍어 놓고.
나 그렇다. 일곱 시간 가까이 되는 첫 편집본을 두 시간으로 줄였다는 보도가 있고, 132분과 180분과 360분짜리 판이 따로 있다는 말도 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서장이라고 불렀다.
친구 서장이면 서장이라고 표를 팔아야지. 본편 값 받고 서장을 보여 주면 그건 환불 사유다.
나 그 점에 대해서는 변호할 말이 없다. 민간인이 변호할 일도 아니고.
친구 그래서, 다음 편이 나오면 볼 거냐.
나 본다. 눈이 또 올 테니까.
친구 눈은 예뻤다.
나 그건 합의가 되는구나.
통화는 거기서 끊겼다. 친구가 어느 장면에서 졸았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묻지 않았다. 볼까 말까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구구단이 들리면 보시고, 검은 옷이 먼저 보이면 친구 편에 서시라.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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