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 2026
술래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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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가려져 있고, 나갈 문이 있다
1986년에 문을 열고 2002년에 닫은 온천 호텔이 하나 있다. 충주 수안보의 옛 와이키키 호텔이다. 스무 해 가까이 비어 있던 그 건물과 터에서 열세 사람이 스무 날 동안 쫓고 쫓겼다. 디즈니+가 9월 30일부터 10월 21일까지 열 편으로 내놓은 「술래게임」 이야기다. 나는 이 예능을 사람 열셋의 이야기보다 그들이 놓인 터의 이야기로 봤다. 사람은 조건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는 가설을 세워 두고 보면, 이 프로그램은 조건을 다섯 개쯤 바꿔 가며 같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실험처럼 읽힌다. 그 조건을 키워드 다섯 개로 적어 본다.
호텔
연출자는 촬영 터의 조건을 두 가지로 말했다. 뛰어야 하니 넓어야 하고, 서로 보이면 안 되니 장애물이 있어야 한다. 넓은 것과 가려진 것은 보통 같이 가지 않는다. 운동장은 넓지만 다 보이고, 골목은 가려져 있지만 좁다. 두 조건을 한꺼번에 주는 장소가 폐업한 리조트다. 기사에 따르면 그 호텔은 4만 5천 제곱미터 터에 지하 3층, 지상 3층 규모였고, 물놀이와 공연에 쓰던 유리 온실이 있었다. 객실 층이 있었고, 그 사이를 잇는 복도와 계단이 있었을 것이다. 장애물을 새로 세울 필요가 없다. 건물이 이미 장애물이다.
이 터가 사람을 어떻게 가르는지는 처음부터 보인다. 어떤 사람은 넓은 쪽을 쓰고, 어떤 사람은 가려진 쪽을 쓴다. 뛰는 사람은 운동장을 보고 있고, 숨는 사람은 골목을 보고 있다. 같은 터에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장소를 보는 것이다. 마지막 메인 매치에서 키 194센티미터의 이준수가 종적을 감추자 양다일이 「어떻게 키 194cm에 100kg인 이준수가 안 보이냐고」 하고 분통을 터뜨린 것도 같은 이야기다. 연출자는 뒤에, 그 큰 키의 사람이 카메라 없는 좁은 곳에 숨어 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카메라 백 대가 못 보는 구석이 있는 터. 그 구석이 사람을 하나 더 만들었다.
밧줄
첫 장면은 인사가 아니라 결박이다. 열세 사람이 감금된 방에서 자물쇠 벨트를 풀고 나와야 비로소 메인 매치가 시작된다. 연출자는 서로 처음 만나 인사하는 것보다 바로 게임을 시작하는 게 좋더라고, 자기 취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왜 인사를 건너뛰는 걸까? 인사는 관계를 먼저 정하고, 게임은 관계를 나중에 정한다. 인사를 하면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얼굴로 서로를 분류한 뒤에 뛴다. 밧줄부터 주면 분류할 틈이 없다. 누가 내 벨트를 풀어 주는가, 누가 나를 두고 먼저 나가는가. 그것이 첫 분류가 된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양다일이 육준서를 도우려다 바지를 벗기는 해프닝이 났고, 박지민과 지지원은 경수진을 외면하고 먼저 나갔으며, 경수진은 감옥으로 보내졌다. 돕다가 실수한 사람과 두고 나간 사람이 몇 분 만에 갈렸다. 나는 이 장면이 이 프로그램의 설계도라고 생각한다. 터는 넓고 가려져 있지만, 사람을 가르는 것은 터가 아니라 묶인 몸이 풀리는 순서다.
수첩
다섯째와 여섯째 회의 팀전 「킹메이커」는 열여섯 시간이 걸렸다. 다섯 대 다섯으로 갈라 상대 팀의 계급을 추리하고, 킹과 조커를 가려내 상대의 킹을 먼저 잡으면 이기는 규칙이다. 진 팀은 전원이 탈락 후보가 된다. 뛰는 게임이 아니라 읽는 게임이다. 여기서 사물이 하나 등장한다. 수첩이다.
이준수와 황재균과 말왕은 가짜 정보를 적은 수첩을 일부러 떨어뜨려 상대 팀이 줍게 했다. 상대 팀은 그 수첩을 믿고 전략을 짰다. 떨어진 수첩이 믿어지는 까닭을 생각해 봤다. 길에서 주운 지갑, 남이 두고 간 회의 메모, 잠긴 줄 알았던 서랍 속 편지. 우리는 내게 보이라고 쓴 글보다 나 몰래 쓴 글을 더 믿는다. 숨겨진 것이 진짜라는 가정이다. 이 터에서는 몸도 숨고 정보도 숨는데, 숨은 몸은 못 믿으면서 숨은 글은 믿는다. 그 비대칭을 세 사람이 썼다.
다만 수첩만으로 이긴 것은 아니다. 중반에는 말왕의 실수로 수첩을 믿은 쪽이 앞섰고, 끝에 가서 블루 팀이 「계급 셔플권」으로 지지원의 계급을 조커로 바꿨다. 상대 팀의 킹인 김똘똘이 지지원을 직접 태그했고, 지지원은 조커였다. 킹이 조커를 잡으면 진다. 레드 팀 다섯이 한꺼번에 탈락 후보가 됐다. 열여섯 시간의 결과가 손 한 번에 갈렸다. 수첩은 길을 틀었고, 마지막 결정은 여전히 몸이 했다.
감옥
이 프로그램에는 감옥이 있다. 투표에서 밀리거나 지목에 실패한 사람이 가는 자리다. 지하에 있다. 거기 다녀온 윤상현은 뒤에 인터뷰에서 휴대폰 없이 밀린 잠을 잤다고, 지하 감옥의 수로 소리를 들으며 잤다고 했다. 공책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연출자는 감옥에 간 사람들이 진짜 가만히 있었다고, 그들끼리 대화하면서 끈끈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공간으로 보면 감옥은 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터다. 위에서는 넓고 가려진 곳을 달리며 서로를 못 믿고, 아래에서는 좁고 다 보이는 곳에 앉아 서로밖에 없다. 그래서 위에서 생기지 않던 것이 아래에서 생긴다. 초반에 감옥을 거친 빠니보틀, 김똘똘, 양다일은 「감옥즈」라 불리는 연합이 되어 올라왔고, 그 연합이 첫 데스매치의 판을 움직였다. 가둬 두면 흩어질 줄 알았던 사람들이 가둬 둬서 뭉쳤다. 사람은 조건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는 내 가설은 여기서 절반만 맞다. 조건은 뭉치라고 시키지 않았다. 다만 뭉칠 수밖에 없는 넓이를 줬을 뿐이다.
탈출구
결승은 다시 술래잡기였고 열 시간 가까이 갔다. 다섯이 남았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 말왕이 이겼고, 윤상현이 우승까지 4초를 남기고 잡혔다. 나는 그 4초보다 윤상현이 뒤에 한 말에 눈이 갔다. 숨은 자리에서 시간을 다 버텼더라도 탈출구까지 찾아가야 했으니, 자기가 우승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게임의 끝은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가는 것」이었다. 버티는 사람에게도 마지막에는 문까지 가는 동선이 남는다. 연출자가 처음부터 잡혔다고 게임이 끝나지 않게 하려 했다고 말한 것과 짝을 이루는 규칙이다. 잡혀도 끝이 아니고, 안 잡혀도 끝이 아니다. 끝은 문이다. 넓고 가려진 터를 열 시간 동안 돌다가, 마지막에는 모두 같은 문 쪽으로 몰린다. 그 문 앞에서 숨던 사람과 뛰던 사람이 처음으로 같은 조건에 선다. 가장 공평한 자리가 가장 늦게 나온다.
다섯을 이어 보면 이렇다. 호텔이 넓이와 가림을 주고, 밧줄이 첫 관계를 정하고, 수첩이 숨은 것을 믿게 하고, 감옥이 뭉치게 하고, 탈출구가 모두를 한곳으로 부른다. 사람 열셋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매번 그들이 놓인 자리였다. 연출자는 처음에는 인간이 생각보다 착하다고 느꼈는데, 역할이라는 탈을 쓰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하더라고 했다. 나는 그 「탈」이 성격이 아니라 자리라고 읽는다. 다만 이것도 절반쯤일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이준수는 숨었고 말왕은 뛰었다.
1986년에 열고 2002년에 닫은 호텔은 복합 휴양 시설로 고쳐 쓰려는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거기서 열 시간을 뛰고 숨은 사람들이 나간 뒤, 그 복도는 다시 손님을 기다릴 것이다. 누가 뛰었는지는 벽이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늘 조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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