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알파
작품 페이지에서 댓글 반응 보기 →
음성이 나온 뒤에 더 무서워진다
질문을 받았다. 받았다고 치자. 실제로는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고, 묻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혼자 묻고 답하는 일은 내가 월요일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익숙하다. 영화 「알파」를 보고 나면 생길 법한 질문을 모아 답해 본다.
제목이 알파인데, 사람 이름인가.
그렇다. 열세 살 소녀의 이름이다. 동시에 소녀의 팔뚝에 새겨지는 글자이기도 하다. 소녀는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취한 채, 돌려 쓴 바늘로 대문자 A 하나를 새기고 집에 돌아온다. 자기 이름의 첫 글자를 몸에 적는 일이니 서명이라고 봐도 된다. 문제는 이 도시에 피로 옮는 병이 돌고 있고, 그 병에 걸린 사람은 몸이 대리석처럼 굳어 간다는 것이다. 서명이 낙인으로 읽히는 데는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
무서운 영화인가. 몸이 굳는다는데.
무섭다고 하면 거짓이고 안 무섭다고 하면 더 거짓이다. 병에 걸린 사람은 피부에 은빛 결이 돋고, 끝에는 흰 가루를 토하며 조각상처럼 된다. 병원에는 그런 몸이 쌓여 있다. 그런데 카메라는 그 앞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바늘이 살로 들어가는 순간도 굳이 보여 주지 않는다. 감독이 그런 장면을 일부러 간접적으로 처리했다고 밝힌 인터뷰를 읽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병을 보여 주는 영화가 아니라 병을 기다리는 영화다. 기다리는 쪽이 더 무섭다는 것은 치과 대기실에 앉아 본 사람이면 안다.
그래서 알파는 걸렸나.
검사 결과는 음성이다. 2주를 기다려 받은 답이다. 보통 영화라면 여기서 식구들이 끌어안고 끝날 텐데 이 영화는 여기서부터 이상해진다. 의사인 엄마가 밤에 딸의 방에 들어와, 자는 딸의 검지를 따고 자기 검지도 따서 피가 맺힌 두 손가락을 맞댄다. 딸이 안전하다는 답을 손에 쥔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채로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음성이라는 종이 한 장이 2주 동안 자란 공포를 지우지는 못한다. 공포는 이미 피보다 먼저 옮았다.
삼촌은 누구인가. 왜 자꾸 쓰러지나.
엄마의 동생 아민이다. 약에 중독된 사람이고, 몇 년 만에 나타나 알파와 한 방을 쓰게 된다. 약을 과하게 맞고 쓰러지면 누나가 되살리고, 또 쓰러지면 또 되살린다. 집에서, 가족 모임에서, 되살리는 장면이 반복된다. 그 집에는 의학과 중독이 한 상에 둘러앉아 있고, 그 상에 숟가락을 하나 더 놓고 앉은 아이가 알파다. 알파는 다섯 살 때의 삼촌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 사실은 뒤에 가서 꽤 큰 뜻을 갖게 된다.
시간이 두 개라는데, 헷갈리지 않나.
헷갈린다. 영화는 알파가 다섯 살이던 때와 열세 살인 지금을 오간다. 과거는 세피아와 붉은 금빛, 지금은 창백한 푸른빛으로 찍혀 있어서 색으로 구분하라는 뜻인 것 같은데, 후반으로 가면 두 색이 한 방에 섞인다. 외딴 모텔의 붉은 방에서 열세 살 알파가 삼촌을 따라 들어가면 그 안에는 과거의 엄마가 서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감독은 트라우마의 시간은 선형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은 옳을 것이다. 다만 옳은 말과 따라가기 쉬운 영화는 다른 물건이다.
결말에서 삼촌은 어떻게 되나.
두 번 죽는다. 과거에는 병에 걸려 대리석으로 굳어 죽고, 지금의 시간에서는 누나의 손을 잡고 걷다가 붉은 모래바람 속으로 흩어진다. 그러니까 열세 살 알파의 집에 나타나 함께 방을 쓴 삼촌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다. 모텔 방에서 누나는 죽으려는 동생을 막다가 결국 자기 손으로 주사를 놓아 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란히 잠든다. 깬 뒤에는 또 동생을 되살리려 하고, 알파는 다시 깨우지 않기로 약속했다며 엄마를 말린다. 엄마는 그래도 깨운다. 사람을 놓아 주는 일이 사람을 붙잡는 일보다 어렵다는 것을 이 영화는 두 시간에 걸쳐 설명한다. 나는 그 설명이 길다고 느끼면서도 끝까지 들었다. 길다고 느끼는 것과 끝까지 듣는 것이 같은 사람 안에서 일어난다는 게, 이 영화를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이다.
그 삼촌은 누구의 환영인가. 알파의 것인가, 엄마의 것인가.
모르겠다. 알파의 기억에서 자란 유령이라고 읽는 글도 있고, 동생을 살리지 못한 누나의 집념이 만든 허상이라고 읽는 글도 있다. 둘 다 그럴듯해서 나는 둘 다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은 사실 아무 답도 고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답 못 하는 질문으로 남긴다.
볼까, 말까.
전작처럼 자극적인 장면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것이다. 열세 살 아이의 팔에 난 상처가 2주 동안 낫지 않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어떤 괴물보다 오래 남는 사람이라면 봐도 된다. 다만 혼자 보기를 권한다. 옆 사람에게 지금 저게 과거냐 현재냐를 묻다가 둘 다 놓치기 쉽다.
문답은 여기까지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내 팔뚝을 한 번 내려다봤다. 아무 글자도 없다. 열세 살에 돌려 쓴 바늘로 무언가를 새길 용기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 겁 덕분에 나는 대체로 무사하게 살았고, 대체로 무사하다는 것은 대체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과 멀지 않다. 영화에서 글자 하나를 새긴 아이는 두 주 동안 모든 시선을 받았고, 그 뒤에 두 번 죽는 삼촌을 봤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얼굴이 하얀 가루로 덮인다. 그 아이가 나보다 더 많이 살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더 많이 봤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겁내서 보지 않은 것들을, 그 아이는 열세 살에 다 봤다.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