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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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먼저 상처 안에 있었다
마른 땅이 갈라진다. 제목 글자가 그 틈에서 솟아오르고, 카메라는 갈라진 틈 안으로 들어가 어둠을 지나더니 누군가의 상처에서 밖으로 나온다. 영화 「알파」가 시작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 첫 몇 초를 오래 생각했다. 상처를 바라보는 카메라와 상처에서 나오는 카메라는 전혀 다른 물건이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카메라는 상처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의 것이다. 나오는 카메라는 그 상처를 안쪽에서 아는 사람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카메라는 두 시간 동안 어느 쪽에 서 있었는가. 질문에서 시작하겠다.
먼저 적어 둘 것이 있다. 열세 살 알파는 파티에서 돌려 쓴 바늘로 팔에 A 자를 새기고 돌아온다. 도시에는 피로 옮는 병이 돌고 있고, 걸린 사람은 몸이 대리석처럼 굳어 간다. 의사인 엄마는 딸이 감염됐을까 두려워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2주 사이 학교에는 소문이 돈다. 거기에 약에 중독된 삼촌 아민이 몇 해 만에 나타나 한집에 산다. 영화는 알파가 다섯 살이던 때와 열세 살인 지금을 오가는데, 과거는 붉고 따뜻한 빛으로, 지금은 잿빛의 차가운 빛으로 찍혀 있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 삼촌이 오래전에 병으로 죽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결말까지 다 말할 것이다.
첫 번째 자리 · 팔에서 한 뼘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가장 자주 서는 자리는 팔에서 한 뼘쯤 떨어진 곳이다. 첫 장면에서 화면에 누운 것은 삼촌의 팔이고, 다섯 살 알파가 그 팔의 주사 자국을 사인펜으로 잇는다. 카메라는 그 팔 바로 위에 있다. 얼굴보다 팔이 먼저 나오는 영화다. 파티에서 알파의 팔에 바늘이 닿을 때도 카메라는 급히 물러나지 않는다. 팔 위에 머물고, 피가 배어 나오는 동안에도 머문다. 이 머무름을 두고 어떤 글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긴장이 살아 있는 순간이라 했고, 어떤 글은 얼굴과 팔에 너무 가까이 붙어서 관객이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칭찬과 불평이 같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가까운 자리.
그런데 가깝다는 것과 들여다본다는 것은 다르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 가까움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수영장 장면이 있다. 알파가 피를 흘리고, 물이 붉어지고,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물 밖으로 달아난다. 이 장면은 짧은 컷을 빠르게 이어 붙여서, 지금 알파가 당하는 쪽인지 밀치는 쪽인지 잠깐 헷갈리게 만든다. 카메라가 물 밖의 아이들 자리에 서 있었다면 그렇게 헷갈릴 수 없었을 것이다. 구경꾼의 자리에서 보면 피 흘리는 아이는 언제나 피해야 할 대상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카메라는 그 자리를 거부한다. 피 흘리는 팔에서 한 뼘, 그 안쪽에 선다.
그래서 첫 장면이 중요하다. 상처를 바라보는 카메라가 아니라 상처에서 나오는 카메라. 이 영화는 병에 걸렸을지 모르는 몸을 바깥에서 찍지 않겠다고 처음 몇 초에 선언한 셈이다. 그 선언이 두 시간 내내 지켜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중반에 삼촌이 쓰러지고 엄마가 되살리는 장면이 되풀이될 때, 가까움은 때로 되풀이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 망설임은 그대로 둔다. 지켜지려 했다는 것은 보인다.
두 번째 자리 · 흔들리는 눈높이
영화 후반에 알파는 삼촌을 따라 밤의 술집에 들어간다. 여기서 카메라가 바뀐다. 손에 들려 흔들리고, 높이는 알파의 눈높이에 맞춰진다. 한 글은 이 장면을 숨 막히고 압도적이라고 적었다. 나는 그 말에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숨이 막히는 것은 알파이고, 카메라는 그 숨 막힘을 바깥에서 설명하는 대신 같은 높이에서 함께 흔들린다. 이 영화의 카메라가 인물을 어떻게 대하는지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자리다.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지 않고, 그 아이의 키에서 흔들린다. 열세 살의 키는 어른들의 어깨 높이다. 그 높이에서 세상은 늘 조금 막혀 있다.
같은 영화 안에 반대의 자리도 있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인 식탁에서 알파는 피를 나눈 사람들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혼자다. 이 집은 베르베르 사람들의 집이고, 식탁에서는 알파가 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오간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식탁이 자기 어린 시절의 식탁과 같다고 말했다. 여자들이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큰 소란. 여기서 외로움은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아이가 앉은 자리에서 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고, 이것은 내 풀이다. 삼촌과 알파가 한 방에서 같은 자세로 괴로워하는 장면도 그렇다. 한 글이 적었듯 카메라는 감정에 과하게 끼어들지 않고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지켜보며, 그 절제 때문에 고통이 더 또렷해진다. 가까이 갈 때와 물러날 때를 이 영화는 알고 있다. 가까이 가는 것은 몸에게, 물러나는 것은 사이에게.
그리고 보여 주지 않은 것 하나. 이 영화의 카메라는 삼촌을 끝까지 산 사람과 똑같이 찍는다. 그의 팔에 가까이 가고, 그의 떨림에 머물고, 그가 조카와 한 방에 눕는 것을 지켜본다.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표시를 카메라는 어디에도 두지 않는다. 알파가 처음부터 겪는 환각, 바람에 찢겨 나가는 공사장 가림막, 침실 천장이 몸 위로 내려앉는 악몽, 그런 것들과 삼촌이 같은 종류일지 모른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 주지 않고 나중에 말해 준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유령을 유령처럼 찍는 것은 쉽다. 반투명하게, 멀리서, 소리 없이. 이 영화는 반대로 간다. 산 사람들이 놓지 못한 사람을, 산 사람들이 보는 그대로 찍는다. 그러면 보는 우리도 놓지 못한다. 어떤 글은 그래서 반전이 멀리서부터 보인다고 불평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숨기려 한 것이 아니라 숨기지 않으려 한 것이라고 읽는다. 카메라가 그를 다르게 찍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결말에서 모텔을 나온 세 사람은 붉은 모래바람 속을 차로 달리고, 차에서 내려 엄마가 삼촌의 손을 잡고 문까지 걸어가는 사이 삼촌은 붉은 모래가 되어 바람에 흩어진다. 그 모래가 렌즈를 때린다. 카메라는 이때도 바깥에 서 있지 않다. 바람 속에 있다. 감독은 그 가루가 왜 붉은지를 묻는 질문에 대리석처럼 하얀색이었다면 환자들은 조각상이 되었을 것이고, 더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첫 장면에서 상처 안에서 나온 카메라가 마지막 장면에서 모래바람 안에 서 있는 것은 그러니까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는 병에 걸린 몸을 조각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그 몸을 바깥에서 찍지 않는 쪽을 택했다. 화면은 마지막에 알파의 얼굴로 천천히 밝아지고, 그 얼굴은 무슨 표정인지 읽기 어렵다.
나는 이 영화를 지지한다. 두 시간 가운데 어떤 시간은 길었고, 그 길었다는 느낌을 지우지는 않겠다. 그래도 카메라가 서 있던 자리 하나만으로 지지할 이유는 된다.
남는 질문이 있다. 상처 안에서 나온 카메라는 끝내 상처 바깥으로 나갔는가, 아니면 우리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는가. 영화가 끝나고 바람이 멎은 뒤에도 그 가루가 어디에 남아 있는지, 당신에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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