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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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되는 병을 기대했고, 기다리는 병을 받았다
결론부터 쓴다. 나는 이 영화에서 괴물을 기대했고, 받은 것은 장례였다. 실망했다. 그리고 실망한 채로 끝까지 앉아 있었다. 둘 다 사실이다.
기대
기대의 근거는 셋이었다. 첫째, 이 감독의 전작 두 편. 하나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이야기였고, 하나는 사람이 금속과 섞이는 이야기였다. 둘 다 몸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둘째, 소재. 피로 옮는 병에 걸리면 몸이 대리석처럼 굳어 간다. 손대면 부서진다. 이 설정 하나면 두 시간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셋째, 칸 경쟁 부문에 올랐고 평이 극과 극으로 갈렸다는 소식. 갈리는 영화는 대개 무언가를 하긴 한 영화다.
그래서 나는 돌이 되는 병을 기다렸다. 몸이 굳는 공포, 그 몸을 피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아이. 그 순서로 오리라 생각했다.
실제
절반은 왔다. 전반부는 날카롭다. 열세 살 알파가 파티에서 돌려 쓴 바늘로 팔에 A를 새기고 돌아온다. 상처는 낫지 않고 피가 계속 난다. 영어 수업 중에 그 피가 교실 프로젝터 유리 위에 떨어지고, 벽에 붉은 빛이 번진다. 아이들은 피 묻은 공을 피하고, 교사는 그 공을 버린다. 수영장에서 알파가 피를 흘리자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 밖으로 나가고, 탈의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여기까지는 내가 기대한 영화였다. 병이 아니라 병에 대한 공포가 사람을 먼저 굳게 만든다. 이 명제를 말이 아니라 장면으로 보여 준다.
병원도 좋았다. 의료진이 많이 떠난 병원에서 엄마는 대리석으로 굳어 가는 환자들을 혼자 돌본다. 그 병원 대기실에 알파의 영어 교사가 앉아 있다. 그의 연인이 병에 걸렸다. 교실에서 시를 읽어 주던 사람이 대기실에서는 아무 말 없이 운다. 영화는 이 사람에게 긴 사연을 주지 않는다. 앉아 있는 모습만 준다. 나는 그 정도가 맞다고 생각했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이 그다음에 하는 일은 대개 그렇게 조용하다.
어긋나는 것은 그 뒤다.
첫째, 모텔의 붉은 방. 영화 후반, 알파는 삼촌 아민을 따라 외딴 모텔에 들어간다. 그 방에는 과거의 엄마가 서 있다. 다섯 살 때의 시간과 열세 살의 시간이 한 방에 포개진다. 누나와 동생은 거기서 작별한다. 긴 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긴 시간 동안 울지 못했다. 지금 저 엄마가 어느 시간의 엄마인지 맞추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시간대를 색으로 구분해 왔다. 과거는 붉고 따뜻하게, 현재는 창백하고 푸르게. 그 약속을 이 방에서 스스로 접는다. 감독은 트라우마의 시간은 선형이 아니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관객이 퍼즐을 푸는 동안 감정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 방에서 길었던 것은 장면이고, 비었던 것은 내 쪽의 감정이었다.
둘째, 학교. 그 날카로운 전반부의 선이 뒤로 이어지지 않는다. 알파를 병 옮긴 애로 몰았던 아드리앙이 자기도 같은 시기에 문신을 했다고 밝힌다. 그 뒤 학교는 영화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이들이 알파를 탈의실에 가둔 그다음이 궁금했다. 알파가 그 아이들 앞에 어떤 얼굴로 다시 섰는지. 영화는 그 질문을 접고 모래바람으로 간다. 붉은 바람은 왜 부는지, 어디서 오는지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말. 삼촌은 두 번 죽는다. 과거에는 병에 걸려 대리석으로 굳고, 현재에는 누나의 손을 잡고 걷다가 붉은 모래가 되어 흩어진다. 열세 살 알파와 방을 나눠 쓴 삼촌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반전으로 치면 큰 반전이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알파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색이 두 개라는 것, 두 시간이 자꾸 겹친다는 것을 영화가 너무 여러 번 알려 줬기 때문이다.
남은 것
그래도 건진 것이 있다. 할머니의 손이다.
이 가족은 알제리에서 온 베르베르 사람들이고, 집에서는 그 말을 쓴다. 할머니는 아들이 쓰러질 때마다 모든 것이 붉은 바람 탓이라며 아들의 몸에 물을 붓는다. 의사인 딸의 심폐소생 옆에서, 어머니는 물을 붓는다. 알파는 그 미신이 필요 없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삼촌이 그 바람을 우습게 말하면 알파는 또 화를 낸다. 이 세 사람은 한 사람을 살리려고 각자 다른 도구를 든다. 과학, 물, 화. 어느 것도 그를 살리지 못한다. 그래도 셋은 손을 놓지 않는다. 나는 이 집의 그다음을 믿게 됐다. 죽는 사람을 막지 못한 식구가 그래도 식탁에 앉는 그다음을.
또 하나. 삼촌이 악몽을 꾸는 알파를 깨워 창문으로 데리고 나가는 밤. 둘은 축구장을 뛰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이는 클럽에 들어가 춤을 춘다. 이 건조한 영화에서 가장 밝은 장면이다. 유령과 춤춘 밤이 가장 살아 있는 밤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 장면은 다르게 남는다.
당신에게 쓴다. 전작의 그 몸을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것이다. 나는 그랬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가를 놓아 주지 못해서 몇 번이고 다시 살려 낸 적이 있다면, 모텔 방의 그 긴 장면은 당신 것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퍼즐을 풀었고, 당신은 울지도 모른다. 그 차이는 영화의 몫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몫이다.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돌이 되는 병을 기대했고, 돌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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