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26

에덴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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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턴을 든 쪽과 기어오는 쪽

필름속산책자· 2026. 10. 31.· 3,695자

질문에서 시작하겠다. 밤의 밭을 기어오는 여자를 찍을 때 카메라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여자 곁에 바짝 붙어 흙과 피를 함께 기어야 하는가, 아니면 현관에서 랜턴과 산탄총을 들고 나온 두 남자 옆에 서서, 어둠 속의 저것이 무엇인지 그들과 함께 모르고 있어야 하는가. 이 일곱 편짜리 드라마의 첫 장면은 뒤쪽을 고른다. 1899년 코네티컷, 피투성이가 된 캐시가 갈아엎은 밭을 기어 트래스크 형제의 집 앞에 닿고, 형제는 랜턴과 총을 들고 나온다. 우리는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어둠이 얼굴을 지우고 있다. 촬영을 맡은 사람은 뒤에 그것이 의도였다고 밝혔다. 그 여자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두기 위해 어둠 속에서 찍었고, 같은 방식을 세 번의 회상 장면에서 되풀이했다고.

나는 이 첫 선택이 일곱 시간 전체의 자리를 정했다고 생각한다. 원작 소설은 1952년에 나왔고 1955년에 영화가 됐다. 그 영화는 소설의 뒷부분, 두 형제의 한 해만 잘라 썼다. 이번 각본을 쓴 사람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손녀이고, 이야기를 형제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그러니까 캐시에게로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캐시를 가운데에 둔 드라마가 첫 장면에서 캐시를 보지 않는 쪽에 카메라를 세운다. 이것은 모순인가, 아니면 약속인가. 당신이 이 드라마를 보았다면 아마 같은 자리에서 같은 것을 물었을 것이다.

첫 장면, 랜턴을 든 쪽

그 밭을 다시 떠올려 본다. 검은 피가 기름진 흙 위에 떨어지고, 여자는 집을 향해 기어간다. 현관의 애덤은 도와주자고 하고 찰스는 보안관을 부르자고 한다. 카메라가 랜턴 쪽에 서 있다는 것은 관객을 형제의 자리에 앉혔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애덤처럼 그 여자를 들여 눕히고 싶어지거나 찰스처럼 의심하게 되는데, 어느 쪽이든 우리가 아는 것은 형제가 아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 위로 목소리가 깔린다. 누군가 말한다, 이 세상에는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괴물이 있다고 믿는다고. 스스로를 괴물이라 부르는 듯한 목소리와, 그 사람을 어둠 속에 그대로 두는 카메라. 둘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하는가. 목소리는 판결을 내리고 카메라는 판결을 유보한다. 나는 이 어긋남이 이 드라마가 캐시를 대하는 방식의 전부라고 본다.

2회에 가서야 카메라는 그 여자 쪽으로 건너간다. 매사추세츠의 소녀 시절, 교사와의 일, 아버지, 불타는 집, 로웰, 보스턴의 에드워즈. 그러나 그 회상들조차 어둠 속에서 찍혔다고 촬영자는 말한다. 알게 된 뒤에도 알 수 없게 둔다는 것. 보여 주면서 밝히지 않는다는 것. 이 거리는 어떤 종류의 예의인가, 아니면 어떤 종류의 공포인가. 애덤은 캐시를 간호하고, 캐시는 기억이 멀쩡하다는 것을 애덤에게만 털어놓고, 찰스에게는 숨겨 달라고 한다. 우리는 애덤이 아는 만큼만 안다. 그래서 결혼식 밤 캐시가 애덤의 차에 약을 타고 찰스에게 가는 장면에서, 배신당하는 사람은 애덤이고 속아 온 사람은 우리다. 카메라가 처음부터 랜턴 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의 동쪽 스틸컷

이 드라마의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촬영자가 설명한 것을 조금 옮긴다. 그는 한 인물의 시점에서 그 인물을 따라가는 긴 샷과 상대 인물을 따라가는 긴 샷을 맞물려 찍는 방식을 좋아하고, 얼굴을 크게 잡는 샷은 아껴 썼다고 했다. 카메라는 관찰하기 위해 있고 주의를 끌기 위해 있지 않다고도 했다. 얼굴을 크게 잡지 않는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는다. 캐시가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그 얼굴을 확대해 진위를 판독하는 자리에 앉지 못한다. 애덤이 앉은 거리에 함께 앉아 있을 뿐이다. 카메라가 인물을 대하는 태도를 묻는다면, 나는 이것이 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카메라는 누구도 심문하지 않는다. 심문하지 않는 카메라 앞에서 괴물이라는 말은 성립하는가.

황혼, 두 남자

두 번째 장면은 빛의 장면이다. 3회, 애덤이 살리나스에서 사들인 목장. 그 집의 중국인 일꾼 리가 샘 해밀턴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 본래의 영어로 말한다. 백인들은 중국인 하인이 서툰 말을 하기를 기대하고, 제대로 된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고. 촬영자는 샘과 리가 함께 있는 황혼 장면을 가장 아끼는 순간으로 꼽았다. 해가 지는 동안 카메라를 끊지 않고 돌렸고, 끝났을 때는 거의 밤이었는데 카메라는 그때까지 남아 있는 빛을 받아 내고 있었다고. 아마 이 대화가 그 장면일 것이다. 틀렸다면 그것은 내 짐작의 잘못이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빛이 사라지는 동안 끊지 않고 서 있는 카메라는 인물을 어떻게 대하는가. 이 드라마는 촛불과 등불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주된 조명으로 썼고, 시대극에 흔히 입히는 빛깔을 따로 입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황혼 장면에서 어두워지는 것은 효과가 아니라 실제로 저무는 저녁이다. 카메라는 두 남자가 어두워지는 것을 허락한다. 캐시를 어둠에서 꺼내 놓지 않은 카메라가, 리는 밝은 데서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둔다. 캐시의 어둠은 모르는 어둠이고 리의 어둠은 저녁의 어둠이다. 같은 검은 화면이 한 사람에게는 가림막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쉴 자리가 된다. 이것이 이 카메라가 두 인물에게 매긴 차이라면, 그 차이는 누가 매긴 것인가. 촬영자인가, 각본인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보려고 애쓰는 우리 쪽인가.

리에 대해 한 가지를 더 적는다. 5회에서 그는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한다. 철도 공사장에서 남자로 위장해 일하다 임신한 몸으로 정체가 드러나 죽었다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그 장면을 찍지 않는다. 리의 입으로만 듣게 한다. 캐시의 과거는 어둡게나마 보여 주고, 리의 과거는 말로만 남긴다. 한 사람의 상처는 영상이 되고 다른 사람의 상처는 증언이 된다. 어느 쪽이 더 존중받은 것인가. 나는 답을 모른다. 다만 보여 주지 않기로 한 자리에도 카메라의 자리가 있다는 것만 안다.

에덴의 동쪽 포스터

보여 주지 않은 것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드라마가 보여 주지 않기로 한 것 하나를 적는다. 애런의 죽음이다. 7회,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게 된 애런은 집을 떠나 군대에 들어가고, 1918년 5월, 프랑스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 우리는 프랑스를 보지 못한다. 참호도, 총도, 애런의 마지막 얼굴도 없다. 종이 한 장이 살리나스에 도착하고 그것으로 끝이다. 1회에서 이 드라마는 애덤이 기병대에서 겪은 것, 원주민 마을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한 세대의 전쟁은 화면에 올리고 다음 세대의 전쟁은 전보로만 온다. 왜인가. 아버지가 겪은 폭력은 아버지를 설명하는 데 필요했고, 아들의 죽음은 설명이 아니라 상실로만 남아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카메라가 처음부터 집 안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밭을 기어오는 여자를 현관에서 보았던 카메라는, 끝까지 집에 남은 사람들 곁에 있기로 한다.

그 집에서 마지막 장면이 온다. 두 번째 뇌졸중으로 누운 애덤의 침대 곁에 칼이 와서 자기가 애런을 죽게 했다고 말하고, 리는 애덤에게 아들을 짓누르지 말고 축복해 달라고 청한다. 애덤은 힘겹게 한 단어를 내놓는다. 팀셸. 리가 앞서 풀어 준 말로, 너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칼이 아버지 곁에 눕고 아버지의 손이 그를 감싼다. 카메라는 그 방에 있다. 떠난 사람들, 프랑스의 애런과 검은 집의 캐시는 이 방에 없다. 나는 이 드라마를 지지한다. 일곱 시간 동안 카메라가 선 자리를 한 번도 속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랜턴을 든 쪽에 선 카메라는 기어오는 여자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남겼다. 그런데 일곱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캐시를 알게 되었는가. 그를 보았는가, 아니면 끝까지 랜턴 뒤에서 어둠을 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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