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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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장에 일 년

무뚝뚝· 2026. 10. 29.· 2,308자

마흔 장에 일 년. 《룩백》에서 후지노가 그렇게 말해요. 둘이서 만든 투고작 한 편이 마흔 장인데, 거기에 일 년이 들었다고. 나는 이 영화에서 그 말이 제일 오래 남더라고요. 그림 얘기도 우정 얘기도 많이들 하시는데, 나한테는 일 얘기로 보였거든요.


줄거리는 아시는 분이 많을 거예요. 학교 신문에 네 컷 만화를 그리던 초등학생 후지노가, 학교에 안 나오는 쿄모토의 그림을 보고 기가 죽어요. 그때부터 책상 앞에 앉아요. 졸업식 날 졸업장을 갖다주러 갔다가 둘이 만나고, 같이 그리고, 상을 받고, 주간지에서 연재 제안이 오고, 쿄모토는 미대에 가겠다고 하고, 후지노는 혼자 연재를 해요. 그리고 미대에서 사건이 나서 쿄모토가 죽어요. 2024년에 나온 애니메이션하고 이야기는 같아요. 이번 건 사람이 연기하고, 40분이 더 길어요.


일하는 장면부터 말할게요. 첫째는 책상이에요. 후지노의 등. 창밖 계절이 바뀌고 종이가 쌓이는데, 카메라는 등만 찍어요. 나중에 종이가 태블릿으로 바뀌어요. 자막으로 몇 년 지났다고 안 알려 주고, 손에 든 도구가 바뀐 걸로 알려 줘요. 이건 그럴듯했어요. 일하는 사람은 세월을 달력으로 안 세고 연장으로 세거든요. 내 주변에도 자기 이력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기계 쓸 때, 그 기계 바뀌고 나서.

펜 소리도 있어요. 감독이 원작자한테 어시스턴트 시절 얘기를 듣다가, 펜이 종이를 긋는 그 소리를 실사로 담고 싶어서 이 영화를 하기로 했대요. 배우 넷이 촬영 몇 달 전부터 그림 연습을 했고, 매주 과제를 받았대요. 후지노 역 배우는 톤 긁는 게 제일 어려웠다고 했고요. 그 연습이 화면에 나와요. 손이 거짓말을 안 해요. 연기자가 손을 연습한 건 그럴듯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맞는 거예요.

룩백 스틸컷

둘째는 편집부예요. 편집자 마에다가 둘한테 연재 얘기를 하면서, 프로가 된다는 게 그런 거라는 취지로 말해요. 건물에서 허리 굽은 남자가 나오면서 다음 달에 또 오겠다고 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영화는 설명 안 해요. 그런데 다음 달에 또 온다는 말이 그 사람 직업을 다 말해 주죠. 달마다 원고 들고 오는 사람이에요. 그 앞에서 후지노가 마흔 장에 일 년 걸렸다고 말해요. 주간지 연재는 매주 원고를 내야 하잖아요. 일 년에 마흔 장 그리던 사람한테 그게 무슨 뜻인지, 영화는 입 밖에 안 내는데 나는 거기서 속으로 셈을 했어요.

셋째는 쿄모토가 배경을 지적받는 장면이에요. 애니메이션에는 없고 이번에 새로 넣었대요. 배경은 쿄모토가 제일 잘하는 거예요. 그걸 지적받아요. 일하는 사람 눈에는 이게 제일 아팠어요. 잘하는 걸로 돈을 받기 시작하면 잘하는 걸 지적받는 게 일이거든요. 취미일 때는 아무도 그런 말 안 해요. 쿄모토가 미대에 가겠다고 하는 게 그 앞인지 뒤인지 순서는 내가 정확히 못 짚겠어요. 그런데 나한테는 둘이 이어져 보였어요. 내 짐작이에요.


돈 얘기 한 번 할게요. 후지노 언니가 미대 나와 봐야 돈 안 된다는 말을 해요. 나중에 후지노가 쿄모토한테 그 말을 그대로 되풀이해요. 자기가 들은 말을 남한테 하는 거예요. 이게 이 영화에서 제일 돈 냄새 나는 대사고, 제일 사람 같은 대사예요. 그 밖에는 돈 얘기가 거의 안 들려요. 상금으로 둘이 놀러 가는 거, 그 정도. 연재 작가가 됐는데 원고료 얘기도 월세 얘기도 내 기억엔 없어요. 그럴듯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여기예요. 열일곱에 잡지하고 계약한 애가 돈 걱정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영화가 일부러 뺐겠죠. 그래도 나는 거기가 비어 보였어요.

룩백 스틸컷

그럴듯한 데를 하나 더. 쿄모토가 손을 비벼서 귀에 대면 바다 소리가 난다고 가르쳐 줘요. 쿄모토가 죽고 나서 후지노가 그걸 혼자 해요. 일하는 사람끼리는 이런 걸로 남아요. 기술 하나, 버릇 하나. 거창한 유언이 아니라요.

쿄모토 방에 바다 그림하고 풍경화가 잔뜩 있는 것도 이번에 넣은 거래요. 헤어진 뒤에도 그 애는 계속 그렸다는 거죠. 만화는 안 그려도 그림은 그렸어요. 일을 바꾼 거지 손을 놓은 게 아니에요. 나는 그게 좋았어요.

룩백 포스터

마지막에 후지노가 다시 책상에 앉아요. 감독이 그 등을 쿄모토의 시선으로 찍었다고 했대요. 글쎄, 나는 그게 쿄모토 시선인지 모르겠고, 그냥 출근하는 등으로 보였어요. 친구가 죽었는데 책상에 앉는 게 매정해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일은 일이에요. 그 애가 좋아하던 만화를 계속 내는 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면, 그걸 하는 거예요. 멋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일이라서.

애니메이션이 더 좋았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빗속에서 논길 뛰는 장면이 덜하다고요. 그건 맞는 말 같아요. 대신 이쪽은 손을 오래 찍어요. 어느 쪽이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손 찍은 쪽이 좋았다는 것만 말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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