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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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것 셋, 바꾸지 않은 것 하나
같은 이야기를 세 가지 재료로 만들면 무엇이 변할까. 종이, 그림, 사람. 「룩백」은 2021년에 만화로 처음 나왔고, 2024년에 애니메이션이 됐고, 2026년에 사람이 연기하는 영화가 됐다. 줄거리는 세 번 다 같다. 나는 줄거리가 같은데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세어 보고 싶었다. 틀릴 수 있다. 원작은 확인한 자료로만 말하고, 읽은 척은 하지 않겠다.
먼저 길이. 원작 단편은 143쪽, 애니메이션은 58분, 실사는 100분이다. 감독은 애니메이션보다 40분을 늘렸다는 의식은 없었다고 말했다. 늘리려고 늘린 게 아니라 채우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뜻으로 나는 읽었다. 무엇으로 채웠는지가 이 글의 내용이다.
원작 / 이 작품
- 쿄모토의 생활. 원작 / 쿄모토의 생활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감독의 표현으로는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물이다. 이 작품 / 쿄모토가 늘 입는 솜옷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것이고, 어린 쿄모토가 할머니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진이 있다. 할머니는 원작에 없는 설정이다.
- 혼잣말. 원작 / 후지노의 속마음은 혼잣말로 나온다. 쿄모토를 잃은 뒤 자기를 탓하는 말도 그렇게 나온다. 이 작품 / 혼잣말을 없애고 대화로 바꿨다. 자기를 탓하는 그 대사는 빠졌다.
- 쿄모토의 방, 마지막. 원작 / 쿄모토의 방에는 후지노의 연재작 「샤크킥」 전권이 있고, 독자 순위를 응원한 흔적이 있다. 이 작품 / 그 자리에 쿄모토가 그린 풍경화들이 걸려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그림 속에서 새가 날고 물고기가 헤엄친다. 실사 화면에 넣은 짧은 애니메이션이다.
- 바꾸지 않은 것. 원작 / 네컷 만화 한 장이 문틈으로 들어가 다른 세계의 쿄모토에게 닿고, 그 세계의 후지노가 쿄모토를 구한다. 이 작품 / 같다. 그 세계의 후지노는 가라테 도장에 있고, 뒤에서 발차기를 한다. 여기는 손대지 않았다.
왜 바꿨을까
세 가지 변경에 대해 이유를 생각해 본다. 추측이다.
쿄모토의 생활을 보강한 이유는 감독이 직접 말했다. 원작의 쿄모토는 원작자 안에 있는 두 사람을 후지노와 쿄모토로 나눠 그린 인물이라서, 실사에서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다고 보여 주기에는 정보가 모자랐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공간에서 살고 무엇을 보고 듣는지를 상상해 보강했다고 했다. 나는 이걸 재료의 문제로 이해한다. 종이 위의 사람은 비어 있어도 읽는 사람이 채운다. 카메라 앞의 사람은 비어 있으면 그냥 빈 사람으로 찍힌다. 그림은 생략이 기본값이고 실사는 존재가 기본값이다. 그러니 쿄모토에게 할머니와 솜옷과 사진을 준 것은 추가라기보다 환산에 가깝다. 다른 단위로 옮길 때 생기는 보정 같은 것이다. 틀릴 수 있다.
혼잣말을 없앤 이유도 감독의 말이 있다. 실사에서 혼잣말은 가짜처럼 느껴질 수 있어 독백을 대화로 바꿨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형식의 문제다. 그런데 자책 대사가 통째로 빠진 것은 형식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 대화로 옮길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한 일본 관객은 감독이 누군가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진 사람이라 그렇게 됐을 거라고 풀었다. 그럴듯하지만 추측이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결과뿐이다. 실사판의 후지노는 원작의 후지노보다 덜 자책하고 더 상실한다.
쿄모토의 방을 「샤크킥」 전권에서 풍경화로 바꾼 이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조심스럽게 짐작한다. 원작에서 그 전권은 쿄모토가 헤어진 뒤에도 후지노를 읽고 응원했다는 증거다. 영화는 그 증거를 쿄모토 자신의 그림으로 바꿨다. 받아 보던 사람에서 그리던 사람으로. 미대에 간 쿄모토가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를 원작은 비워 두는데, 영화는 바다 그림으로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그림을 움직이게 한다. 아마 영화는 쿄모토가 후지노를 보고 있었다는 쪽보다 쿄모토도 계속 그리고 있었다는 쪽을 택한 것이다. 둘 다 사실일 수 있는데 하나만 보여 줄 수 있는 게 영화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얻은 것은 시간의 두께다. 영화는 2월에서 11월까지 계절을 나눠 필름으로 찍었다. 애니메이션이 창밖 계절을 빠르게 넘겨 몇 해를 접었다면, 실사는 계절 하나하나에 머문다. 두 사람이 같이 보낸 시간이 원작보다 길게 보인다. 바다에 가고 수족관에 가고 영화관에 간다. 그래서 잃는 장면이 왔을 때 잃은 것의 부피가 다르다. 어림잡아 말하면, 원작이 기울기를 보여 주는 이야기였다면 영화는 면적을 보여 주는 이야기다.
잃은 것은 속도다. 원작의 짧음이 주던 날카로움이 무뎌졌다는 지적이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나왔다. 빗속 논길은 애니메이션만큼 세지 않고, 미대 습격 장면은 늘어난 길이에 비해 짧고 조용하다. 「샤크킥」 전권이 빠지면서 그 만화가 이야기에서 하던 역할도 가벼워졌다는 지적이 있다. 나는 이 지적들이 맞다고 본다. 다만 잃은 것이 실수인지 거래인지는 구분하고 싶다. 속도를 내주고 두께를 샀다. 거래의 결과가 마음에 드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같은 이야기를 세 가지 재료로 만들면 무엇이 변하나. 줄거리는 안 변한다. 변하는 건 비어 있는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다. 종이는 읽는 사람이 채우고, 그림은 그린 사람이 채우고, 실사는 거기 있는 사람과 집과 계절이 채운다. 영화는 그 자리를 할머니의 솜옷과 바다 그림으로 채웠다. 다른 것으로 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 채웠는지는 분명하게 보인다. 그 정도면 다시 만든 쪽이 할 일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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