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17
드래곤볼 슈퍼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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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은 것은 펴진다
결론부터. 이 애니는 합체를 두 번 하고, 두 번 다 실패한다. 나는 그 실패가 마음에 들었다.
싫은 것
솔직히 말하자. 나는 전투 애니가 벽에 부딪혔을 때 꺼내는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목록을 적어 둔다.
- 위기마다 새로 돋는 변신
- 두 사람을 하나로 접는 합체
- 지구 전체가 손을 들어 주는 기 모으기
- 오래된 규칙을 한 줄로 고쳐 쓰는 설명
- 다음 회 제목이 미리 말해 주는 반전
다섯 개 다 「더 세진다」를 그리는 방법이다. 센 적이 나오면 더 세진다. 더 센 적이 나오면 더더 세진다. 그러다 보면 숫자만 남는다. 그중에서도 합체가 제일 싫다. 두 인물이 하나가 되는 순간, 둘이 스무 회에 걸쳐 쌓은 관계가 접혀서 서랍에 들어간다. 접힌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이 작품은 다섯 개를 전부 한다. 하나도 피하지 않는다. 15화에서 트랭크스는 블랙과 자마스에게 조롱당한다. 오공이 심장병으로 죽게 두었으면 블랙은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네가 블랙을 만든 것이라고. 트랭크스는 그 말에 새 변신을 한다. 노란 기운에 파란빛이 섞이고 눈동자에서 색이 빠진다. 이름도 설명도 없다. 화가 나서 세졌다. 그게 전부다. 20화에서는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 손을 들어 트랭크스의 부러진 검에 기를 모아 준다. 18화의 제목은 그 회가 끝나기 직전에 나올 합체를 미리 말해 준다. 같은 20화에서 고와스는 포타라 합체가 계왕신이 아니면 한 시간밖에 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예전 작품에서는 영원히 간다던 규칙이다. 한 줄로 고쳐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끌 만하다. 나는 끄지 않았다.
이 작품
먼저 18화의 블랙. 베지터에게 밀리던 블랙은 베지터가 화로 세지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한다. 화를 내서 세진다. 그러고는 기로 낫을 만든다. 낫이 공간을 찢고, 찢어진 틈에서 블랙의 복제가 여럿 쏟아진다. 그게 뭐냐고 묻자 블랙은 자기도 모른다고, 그래도 멋있지 않냐고 답한다. 나는 이 대답이 좋았다. 더 세지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 작품은 많다. 모른다고 대놓고 말하는 작품은 드물다. 적어도 이 작품은 자기가 꺼내는 물건이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아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다르지만, 아는 것이 먼저다.
합체는 악당이 먼저 한다. 18화. 트랭크스가 접착제로 붙인 항아리에 자마스를 가두는 데까지는 성공하고, 그 봉인이 실패로 돌아간 뒤, 블랙과 자마스는 포타라 귀걸이를 끼고 하나가 된다. 19화의 합체 자마스는 등 뒤에 후광을 달고 나온다. 신이 됐다는 그림이다. 오공과 베지터는 손도 제대로 못 쓰고 쓰러진다.
그다음이 이상하다. 20화에서 계왕신이 말한다. 합체한 자마스의 반은 인간이었으니 완전한 불사는 아닐지 모른다고. 그래서 오공과 베지터도 귀걸이를 낀다. 베지터는 마지못해 낀다. 베지트가 나오고, 곧바로 파랗게 변하고, 합체 자마스를 밀어붙인다. 그리고 한 시간이라던 합체가 한 시간은커녕 결정타를 넣기 직전에 풀린다. 파란 몸이 기를 너무 빨리 쓴다는 설명이 붙는다. 다시 오공과 베지터다. 접었던 것이 펴졌다.
자마스 쪽도 멀쩡하지 않다. 베지트에게 밀리는 동안 자마스는 화를 내고, 화를 낼수록 몸이 일그러진다. 그는 운다. 인간의 죄와 신의 실패를 이 몸에 짊어졌다고 말하면서 운다. 한 리뷰는 그 눈물과 베지트의 시큰둥한 표정을 나란히 놓고 멜로드라마 같다고 썼다. 나는 그 시큰둥함이 작품의 표정이라고 본다. 합체는 정의가 아니었다. 합체는 둘이 섞여서 어느 쪽도 못 되는 몸이었다.
여기서 17화로 돌아간다. 베지터가 블랙을 압도하면서 하는 말이 있다. 그 몸은 원래 주인만 제대로 쓸 수 있다. 너는 가짜 사이어인이다. 나는 진짜 왕자다. 수련하고 돌아와 갑자기 세진 베지터를 두고 한 리뷰는 믿기 어려운 힘의 상승이라고 꼬집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대사를 이 작품에서 가장 믿는다. 빌린 몸은 끝까지 못 간다. 그 말을 베지터가 블랙에게 했고, 작품은 그 말을 베지트에게도 적용했다. 베지트도 빌린 몸이다. 둘이 서로에게 빌린 몸. 그래서 풀린다. 자마스의 몸도 훔친 오공의 반쪽이다. 그래서 무너진다.
합체를 싫어하는 이유가 접힌 관계가 안 보여서라고 썼다. 이 작품은 접자마자 편다. 베지트가 풀린 자리에 오공과 베지터가 따로 서고, 그 뒤를 트랭크스가 맡는다. 셋이다. 하나가 아니라. 그 뒤의 결말은 다른 글들이 충분히 말했으니 적지 않는다. 내가 적고 싶은 것은 그 전까지다. 이 작품은 내가 싫어하는 물건을 전부 꺼내 놓고, 그중 가장 싫어하는 것 하나를 두 번 실패시켰다. 변신은 그냥 생긴다. 손 들기도 그냥 통한다. 합체만 안 통한다. 왜 하필 합체인가. 나는 만든 사람들이 알고 했다고 믿고 싶다. 모르고 했다면 운이 좋았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접은 것은 펴지고, 펴진 자리에 둘이 따로 서 있다. 나는 그 그림을 보려고 스무 회를 봤다.
지루했나. 아니다. 짜증났나. 자주. 그런데 끄지 않았다. 모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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