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26

올 그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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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이 아니라 뛰는 걸 봐야 했다

삐뚜름관람· 2026. 11. 03.· 2,882자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 랩이 썩 좋지 않았다. 래퍼를 꿈꾸는 여고생이 주인공인데 랩이 안 좋으면 어쩌자는 거냐고 투덜대면서 봤다. 그런데 다 보고 나니 투덜댄 쪽이 나였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 배우가 한 일은 랩이 아니었다. 랩을 하는 사람의 몸을 한 거였다. 졌다.

영화는 2026년 일본 영화 「올 그린스」다. 이바라키현의 시골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고생 셋이 학교 옥상의 버려진 비닐하우스에서 대마를 키워 돈을 모아 마을을 뜨려고 하는 이야기다. 그중 래퍼를 꿈꾸는 히데미를 미나미 사라가 맡았다. 오늘은 이 배우가 이 배역에서 한 선택만 쓴다. 다른 둘도 좋았지만 그건 다음 사람이 쓸 것이다.

먼저 못난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남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손에 꼽는다. 노래방에서도 마이크를 돌린다. 못 불러서가 아니라 부르는 내 얼굴을 누가 보는 게 싫어서다. 그래서 랩을 하는 사람, 그것도 남 앞에서 자기 얘기를 박자에 얹어 내뱉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얄밉다.

그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으니 첫 번째 장면은 당연히 랩이다. 히데미는 밤마다 역 앞에서 하는 사이퍼에 나간다. 학교에서는 서열 바닥이고 집에 가면 아버지가 손을 든다. 그 애가 숨 쉬는 유일한 자리가 거기다. 그런데 그 모습을 같은 반의 미루쿠에게 들킨다. 밝고 인기 많고 달리기도 잘하는, 히데미가 제일 멀리 두고 싶은 종류의 아이다. 어느 밤 집에 가는 길에 미루쿠가 히데미를 붙잡고 랩 하는 거 봤다고, 한번 해 보라고 한다. 히데미는 싫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다. 그런데 그 랩이 미루쿠를 겨눈다. 너처럼 청춘다운 청춘을 보내는 애는 모른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미나미 사라가 한 선택이 재밌다. 보통 이 장면을 맡으면 멋있게 하고 싶어진다. 비트에 딱딱 맞춰서, 고개를 까딱이면서, 보는 사람이 「오」 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이 배우는 그걸 안 한다. 랩을 하는 동안 무대 위의 래퍼처럼 굴지 않는다. 화를 쏟아내듯이 한다.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 거는 사람 쪽이다. 그래서 랩이 좀 그랬다고 느낀 건데, 지나고 보니 그게 맞는 선택이었다. 이 애는 무대 위의 래퍼가 아니라 밤길에서 화를 내는 열일곱이다. 화를 랩으로밖에 못 내는 아이다. 그리고 미루쿠는 그 랩을 듣고 히데미를 껴안는다. 그런 청춘은 다 가짜라고 하면서. 랩이 멋있었으면 이 포옹이 안 나온다. 랩이 서툴러서 포옹이 나온다.

올 그린스 스틸컷

두 번째 장면은 반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장면이다. 사이퍼 동료를 통해, 녹음 일을 한다는 사토라는 남자가 히데미의 재능을 눈여겨봤다는 말이 들어온다. 히데미는 그 말을 믿고 남자의 스튜디오에 간다. 남자는 음료에 약을 탄다. 히데미는 잔을 바꿔치기한다. 그리고 남자가 쓰러질 때까지 기다린다. 이 기다림이 이 배우가 한 일 중에 제일 좋았다.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가는 대신 기다리는 쪽을 고른 인물이고, 배우는 그 선택을 과장하지 않는다. 다른 배우라면 여기서 관객이 안심하도록 뭔가를 더 보여 줬을 것이다. 떨리는 손이라든가. 이 배우는 관객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남자가 쓰러지자 때려눕히고 지갑과 대마 씨앗을 챙겨 나온다. 영화 전체가 이 씨앗에서 시작되는데, 그 시작을 이렇게 조용하게 한다.

이 조용함이 이 배역의 기본값이다. 영화 내내 히데미는 잘 웃지 않고, 잘 설명하지 않고, 친구들에게도 마음을 반만 연다. 해외 리뷰 하나는 이 연기를 까다로운 인물을 꾸미지 않고 보여 준 것으로 평했는데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까다로운 사람을 연기하면서 관객에게 사랑받으려고 하지 않는 게 어렵다. 이 배우는 사랑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투덜댔고, 그래서 내가 졌다.

세 번째 장면은 끝이다. 졸업식 날 히데미는 혼자 옥상에 올라간다. 비닐하우스에 기름을 붓고 사토를 불러낸다. 남자가 하우스 안에 들어간 순간 불을 붙인다. 폭발이 나고, 대마 연기가 졸업식이 열리는 체육관으로 흘러 들어가고, 학교 전체가 웃음바다가 된다. 그 와중에 히데미는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자전거 보관소의 함석 지붕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일어나서 교문 밖으로 달린다.

내가 제일 좋았던 1초는 함석 지붕에 떨어졌다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뛰어내리는 건 누구나 멋있게 찍을 수 있다. 떨어진 다음에 일어나서 뛰는 몸은 배우가 만들어야 한다. 이 배우는 그 뒤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는 걸로 채운다. 생각해 보면 달리기 잘하는 건 육상부 미루쿠다. 히데미는 역 앞에서 밤에 랩이나 하던 애다. 그 애가 처음으로 전력으로 뛴다. 랩보다 이게 먼저 보였어야 했다. 나는 랩만 보고 있었다.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니 이 배우가 랩 장면을 위해 꽤 오래 연습했다고 한다. 영화 음악을 맡은 사람이 랩을 직접 지도했다는 글도 봤다. 그러니까 랩이 서툴게 들리는 건 연습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기로 한 것에 가깝다. 아마 그럴 것이다. 확신은 못 한다. 재밌는 건 이 랩에 대한 평이 나라마다 갈린다는 거다. 일본 쪽 감상글에는 랩이 놀랄 만큼 어울렸다는 말이 있고, 한국 관객 후기에는 래퍼 설정인데 랩이 아쉽다는 말이 있다. 나는 한국 쪽에 가까웠다가 일본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같은 랩을 두고 한쪽은 잘한다고 하고 한쪽은 아쉽다고 하면, 보통 그 랩은 멋있으려고 한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걸 하려고 한 랩이다.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다. 멋있는 랩을 하는 여고생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금방 잊었을 거라는 것.

올 그린스 포스터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세 사람의 앞날이 자막으로 나온다. 별로 좋은 앞날이 아니다. 그걸 미루쿠가 웃으면서 그럴 리가 있냐고 소리치면서 영화가 끝난다. 나는 그 장면에서 히데미 생각을 했다. 자막 속의 히데미는 고향에 주저앉아 있다. 그런데 내가 본 히데미는 교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느 쪽이 맞는지 영화는 안 알려 준다. 나는 뛰어나간 쪽을 믿기로 했다. 그 숨찬 달리기를 봤기 때문이다.

히데미야, 뛰어라. 랩은 나중에 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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